원어 항목명 | Young Sang Ka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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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永商 |
영문 | Young Sang Ka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세계)/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일리노이주 시카고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9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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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5년 8월 17일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8월 |
추모 시기/일시 | 2013년 |
출생지 |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 취성동 |
거주|이주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
거주|이주지 |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
활동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
활동지 |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
원어 항목명 | Young Sang Kang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미국에서 식당을 경영하며 각종 의연금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독립운동가.
강영상(姜永商)[1892~?]은 대한인국민회 애크론지방회를 설립하였고, 시카고에서 강영대(姜永大)·강영소(姜永韶) 형제와 함께 식당을 경영하며 많은 의연금으로 대한인국민회의 활동을 도운 인물이다.
강영상은 1892년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에서 태어났다. 1905년 5월 29일 아버지 강명화가 첫째 아들 강영대, 둘째 아들 강영소 부부와 다섯째 아들 강영각을 데리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고, 이후 미국 본토로 건너가 생활 기반을 닦았다. 1913년 바로 위 형인 셋째 아들 강영문도 고향을 떠나 12월에 하와이로 출국하였다. 1915년 넷째 아들인 강영상도 고향을 떠나 8월 17일에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1918년 11월 말부터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뉴욕 소약속국동맹회의(小弱屬國同盟會議)와 파리강화회의에 한인 대표를 파견하며 독립운동의 열기를 고조시켰다. 이에 강영상도 1919년 1월 16일 오하이오주 애크런에서 형 강영문을 비롯한 임초(林超), 노정민(盧正敏)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 지방회의 설립을 청원하고 대한인국민회 애크론지방회 실업부원이 되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1918년 11월 24일부터 한인 대표 파견을 위한 특별 의연금 모금 운동을 시작했고, 이후 3.1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대대적인 독립 의연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강영상은 1919년 12월 15일까지 특별 의연금, 독립 의연금, 이십일 예납금(二十一例納金), 애국금, 독립 공채 등 다섯 종류의 독립운동 의연금 모금 운동에 79달러 21센트를 의연하였다. 1923년 8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양주원·신성원과 동업하여 서양식 식당을 개업하였다. 1924년 2월에는 둘째 형 강영소의 부름으로 시카고로 이거했고, 강영대·강영소·강영문 형제가 운영하는 로렌스 카페테리아의 식당 경영에 참여하여 사업을 크게 확장하였다.
1931년 둘째 형 강영소의 와병으로 사업상 큰 위기를 맞이했고, 1933년 2월 다시 식당 사업을 일으켰다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1936년 1월에는 사업을 접게 되었다. 강영상은 미국에 와서 식당 경영을 펼치던 기간 동안에 의무금, 독립금, 『신한민보』 보조금, 특별 외교비 의연금 등 총 343달러를 의연하며 대한인국민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한국 독립운동을 도왔다.
2013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