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회의 개최지

한자 -會議開催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세계)/터
지역 미국 워싱턴 D.C. 디 스트리트 노스웨스트 1775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1년 11월 12일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2년 2월 6일
소재지 미국 워싱턴 D.C. 디 스트리트 노스웨스트 1775
원어 주소 1775 D Street Northwest, Washington, DC 20006, USA
영문 주소 1775 D Street Northwest, Washington, DC 20006, USA
성격 워싱턴회의 개최 장소
정의

1921~1922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워싱턴회의가 개최된 장소.

변천

1921년 3월 4일 워런 G. 하딩(Warren G. Harding)이 제29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고, 취임 이후인 7월 11일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고 침략 정책을 봉쇄하기 위해서 워싱턴회의[Washington Conference]를 제안하였다. 워싱턴회의는 태평양회의 또는 태평양군축회의라고도 불렸는데, 1921년 11월 12일부터 다음 해 2월 6일까지 개최되었다.

워싱턴회의의 주요 의제는 총 31건으로 14건의 중국 문호 개방 문제, 7건의 일본과의 현안 사항, 4건의 러시아 및 시베리아 문제, 그리고 5건의 한국을 비롯한 극동과 태평양 지역 문제를 다루었다.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는 임시정부에서는 워싱턴회의를 대비해 ‘한국대표단[Korean Mission]’을 구성하게 되었는데, 한국대표단 단장 이승만(李承晩), 부단장 서재필(徐載弼), 서기 정한경(鄭翰景), 법률고문 프레드 A. 돌프(Fred A. Dolph), 특별 고문 찰스 S. 토머스(Charles S. Thomas)로 구성하였다. 한국대표단은 워싱턴회의의 본 회의에는 참가할 수 없었으나 하딩 대통령을 비롯해 미국의 언론에 한국의 문제가 논의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전 세계에 한국의 문제를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워싱턴회의 한국대표단은 1921년 10월 1일 연명으로 미국대표단의 찰스 E. 휴스(Charles E. Hughes), 헨리 C. 로지(Henry C. Lodge), 엘리후 루트(Elihu Root), 오스카 W. 언더우드(Oscar W. Underwood)에게 청원서를 보냈다. 10월 중순에는 하딩 대통령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 워싱턴회의에 한국대표단이 참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한국대표단의 청원서와 요청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1921년 12월 1일 ‘군축회의에 대한 한국의 호소’를, 이듬해 1월 2일에는 ‘한국의 호소: 속편’ 등의 문건을 배포하였다. 또한 한국대표단의 활동을 고무시키기 위해 국내에서는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라는 독립 청원서를 작성하였다.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는 한국 문제의 해결 없이는 동양의 평화, 나아가 세계의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3.1독립선언과 마찬가지로 성명서 뒤에는 황족 대표 1명[이강]과 귀족 대표 2명[김윤식·민영규], 종교·사회단체 대표 101명과 전국 지역대표 271명 등 총 372명의 서명이 있다.

워싱턴회의는 1922년 2월 6일 3개월에 걸친 회의를 마쳤는데, 미국과 일본 간의 현안을 일괄 타결 지으면서 이른바 ‘워싱턴 체제’를 성립시켰다. 한국대표단은 이 회의에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구미위원부는 존폐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고, 중국 상하이임시정부는 내각 구성조차 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위치

워싱턴회의가 개최된 ‘도터스 오브 더 아메리칸 레볼루션(Daughters of the American Revolution)’ 건물은 미국 워싱턴 D.C.의 백악관 근처인 디 스트리트 노스웨스트 1775에 있다.

현황

2022년 현재 도터스 오브 더 아메리칸 레볼루션 건물은 도서관과 기념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1921년 11월 12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팽창을 봉쇄하기 위해 미국 등 9개국이 참가한 워싱턴회의를 개최하였으며, 이승만을 단장으로 한 한국대표단은 한국 문제를 상정하기 위한 외교 활동을 펼쳤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 고정휴, 『이승만과 한국 독립운동』(연세대학교 출판부, 2004)
  •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실태조사 보고서』9(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 2009)
  • 고정휴, 「워싱턴회의(1921~22)와 한국 민족운동」(『한국 민족운동사 연구』35,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2003)
  • 고정휴,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1921)의 진위 논란과 서명인 분석」(『한국 근현대사 연구』58, 한국근현대사학회, 2011)
  • 홍선표, 「한국 독립운동을 도운 미국인」(『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43, 독립기념관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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