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Monument to Seo Jae P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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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載弼紀念碑 |
영문 | Monument to Seo Jae Pil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세계)/비 |
지역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미디어 노스 프로비던스 로드 1671 |
시대 | 현대/현대 |
건립 시기/일시 | 1975년 11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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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미디어 노스 프로비던스 로드 1671 |
원어 항목명 | Monument to Seo Jae Pil |
원어 주소 | 1671 North Providence Road, Media, PA 19063, USA |
영문 주소 | 1671 North Providence Road, Media, PA 19063, USA |
GPS 좌표 | 39.941795783160785, -75.39470003068799 |
성격 | 기념비 |
작가 | 김흥수|이은상|이정식 |
재질 | 화강암 |
관리자 | 서재필기념재단 |
1975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델라웨어카운티 미디어 로즈트리 파크에 건립된 서재필의 기념비.
서재필 기념비(徐載弼紀念碑)는 미주 한인 사회의 개척자이며 광복 운동의 선구자인 서재필[1864~1951]의 업적을 기리고 그 뜻을 계승하기 위하여 1975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델라웨어카운티의 로즈트리 파크(Rose Tree Park)에 건립한 기념비이다.
서재필 기념비 건립은 1965년경 필라델피아 지역 한인 학생회가 처음으로 추진하다 중단되었다. 이후 1973년 3월 1일 3.1절 기념행사 때 필라델피아 한인회장 임덕상[당시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수학과 교수]과 한인회 임원들이 서재필 생가 방문 후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 건립을 결의하면서 재추진되었다. 1974년 5월 24일 서재필박사기념비 건립위원회가 발족했고, 위원장에 임덕상, 사무총장에 박상익이 선출되었다.
서재필박사기념비 건립위원회는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미국 동부의 한인 단체와 한인 사회를 대상으로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우선 한인 교회와 한인 단체들을 통해 6,000달러를 모금했고, 부족한 자금은 한국 정부로부터 1만 8000달러, 워싱턴과 뉴욕의 한인 동포들이 각각 1,500달러를 지원해 주어 마침내 건립에 착수하였다. 기념비 건립 장소는 미국 정부를 대신하여 델러웨어카운티가 무료로 제공한 로즈트리 파크로 선정되었다. 당초 기념비 건립 예정일은 1975년 3월 1일로 계획했으나 제작이 지체되어 1975년 11월 22일 오후 3시 30분 로즈트리 파크에서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운반 도중 왼쪽 비석이 금이 가 부득이 오른쪽 비석만 세웠다.
필라델피아 한인회가 서재필 기념비를 세운 목적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미주 역사상 첫 번째 한인 개척자이며 광복 운동에 생애를 바친 개화의 선구자인 서재필의 업적을 찬양하며 그 뜻을 계승한다. 둘째, 한민족의 정신적 지주를 구축하여 상호 간 협력과 단결심을 고취하고 이방인화 할 우려가 있는 재미 교포와 2세들에게 한국의 얼을 심고 조국애를 되새기게 한다. 셋째, 미국독립선언의 상징 도시인 필라델피아 지역에 기념비를 세움으로써 한국의 국위를 선양하고 교포들에게 고인의 정신을 고취하기 위함이다.”
서재필 기념비는 직사각형의 모형으로 맨 위는 지붕 형태의 조각을 얹었다. 기념비의 높이는 10피트 반[약 4m]이고 무게는 3톤 반이다. 비문 디자인은 김흥수(金興洙) 화백이 하였다.
비문 전면에는 서재필 흉상과 “겨레의 선각자 송재 서재필 박사 기념비”란 글이 새겨져 있다. 비문 하단에는 “필라델피아 지역 한국인 동포들은 겨레의 선각자인 서재필 박사의 뜻을 길이 받들기 위하여 기념비를 세운다. 1975년 3월 1일 필라델피아 한인회 동포 일동”으로 되어 있다. 비문 후면의 한글은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이 짓고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이 썼고, 영문 글은 이정식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교수가 썼다.
비문 후면 한글 내용은 “서재필 박사는 일찍 한국 보성에서 태어나 스물두 살에 개화당을 조직하여 활약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미국에 망명했었다. 십년 후 고국에 가서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만들어 개화사상을 고취하여 독립문을 세우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왔다. 나라도 없어 돌아갈 길 없었던 오십년 동안 오직 일편단심 조국 광복을 위하여 기원했으며 해방 후 고국을 방문하고 다시 이곳으로 와 몸은 비록 만리이역에서 세상을 마쳤으니 나라 사랑하던 정신을 길이 살아 전하리라. 일천 구백 칠십 오년 삼월 일일 이은상 글 김충현 씀”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