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歐美委員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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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세계)/터 |
지역 | 미국 워싱턴 D.C. 14번가 노스웨스트 H 스트리트 노스웨스트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건립 시기/일시 | 1919년 8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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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미국 워싱턴 D.C. 14번가 노스웨스트|H 스트리트 노스웨스트 |
원어 주소 | 14th Street Northwest&H Street Northwest, Washington, DC 20005, USA |
영문 주소 | 14th Street Northwest&H Street Northwest, Washington, DC 20005, USA |
성격 | 사무소 |
이승만(李承晩)은 3.1운동 이후 국내에서 선포된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로 추대되었다는 문서를 받고, 1919년 8월 25일 집정관 총재 행정령 제2호로 ‘대한민국 특파구미주차위원부[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를 설립하게 되었다. ‘특파구미주차위원부’를 줄여서 일반적으로 ‘구미위원부’라고 칭하였다. 구미위원부의 역할은 첫째로,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에 대한 외교 및 선전 활동이고, 둘째로는 미주 한인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일이었다. 구미위원부는 설립 초기 워싱턴 D.C.에 임시 대통령 공관과 위원부 사무소를 두었으며, 미주 지역 교민 사회에 지방위원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주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는 대한민국통신부를, 프랑스 파리에는 한국대표부를 두었다.
워싱턴 D.C. 사무소에는 위원 3명과 법률 고문 1명, 사무원 2명이 있었다. 위원장은 김규식(金奎植)·현순(玄楯)·서재필(徐載弼)이 차례로 역임하였고, 위원은 이대위(李大爲)·송헌주(宋憲澍)·정한경(鄭翰景) 등이 선임되었다. 구미위원부에서는 미국 내에서 한국 문제에 동정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한국친우회[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여, 1921년 7월경 미국 내 21개 지역과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에도 지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구미위원부에서는 미국 의회에서 한국 문제가 공식적인 의제가 될 수 있도록 청원 문건을 작성하여 친한적인 의원들에게 제공하였다.
구미위원부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현안들을 포괄적으로 다루었던 워싱턴회의[1921. 11~1922. 2]에 큰 기대를 걸고 ‘한국대표단’을 구성하여 외교 활동을 펼쳤다. 그렇지만 비공식적인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고 그 결과 외교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22년 워싱턴군축회의 폐회 이후부터 활동이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준정부적인 외교기관으로 활동하던 구미위원부는 1925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폐지령이 내려진 이후 특별한 외부 활동 없이 명맥만 유지하였다. 1941년 4월 해외한족대회를 계기로 성립된 주미외교위원부가 신설되자,구미위원부의 역할은 주미외교위원부로 계승되었다.
워싱턴 D.C. 구미위원부[H 스트리트] 사무실은 1926년까지 약 7년간 워싱턴 D.C.의 중심에 있는 백악관으로부터 불과 두 블록 떨어진 콘티넨탈 트러스트 빌딩(Continental Trust Building) 908호에 있었다. 콘티넨탈 트러스트 빌딩은 미국 워싱턴 D.C. 노스웨스트 14번가&H 스트리트에 자리하였다. 이승만의 개인 비서인 임병직(林炳稷)의 회고에 의하면, “사무실은 14번가와 H가[14th and H Street]에 있는 콘티넨탈 빌딩 위층 두 방을 물색하였다. 두 사무실 중 한 개는 이 박사의 집무실이었고, 또 한 사무실은 그 후 공모한 미국인 여비서와 더불어 내가 일하는 비서실로 충당되었다”고 하였다.
워싱턴 D.C. 구미위원부[H 스트리트] 사무소가 있었던 콘티넨탈 트러스트 빌딩은 12층으로 현재도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주소가 H스트리트 1343으로 변경되었고, 빌딩은 현재 리얼 에스테이트 트러스트 컴퍼니(Real Estate Trust Company)에서 소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