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회 독립청원 활동

한자 新韓會獨立請願活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세계)/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미국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8년
정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뉴욕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조직된 신한회가 미국 정부를 상대로 전개한 청원 활동.

역사적 배경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을 수습하기 위하여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무렵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였다. 한인들은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한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소약국동맹회의 참가와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전개한 활동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활동에 신한회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경과

미주 지역 한인들의 한국 독립을 위한 움직임은 제1차 세계대전이 실질적으로 종결되는 1918년 11월 중순경부터 뉴욕에서 개최될 소약국동맹회의에서 시작되었다. 이 회의와 관련하여 가장 일찍 반응을 보인 것은 김헌식(金憲植) 등이 중심이 되어 뉴욕에서 조직된 신한회 회원들이었다. 신한회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과 상원·하원의원 및 파리강화회의 미국대표단에게 한국 독립을 위한 청원문을 보내며 본격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청원문은 “미국 정부는 한미 조약의 거중 조정에 따라 한국을 보호하고 일본의 통치권에서 벗어나게 하여 달라.”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식민지 한국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12개의 결의 항목을 제시하여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신한회김헌식과 신성구는 직접 미국 국무부와 상원을 방문하여 청원문을 전달하려고 했으나 거부당하자 파리에 가 있던 미국대표단의 대표 랜싱 국무장관에게 직접 보내기도 하였다.

신한회는 1918년 소약국동맹회의에 김헌식을 파견하였다. 김헌식은 인도, 폴란드, 체코, 아일랜드의 대표들과 함께 대회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김헌식은 스스로를 한인 단체의 대표자라고 자칭하면서 뉴욕과 워싱턴의 중국인에게 기부금을 청하여 의연금을 거두고, 함께 참석한 대한인국민회의 대표 민찬호(閔贊鎬)정한경(鄭翰景)을 정식 대표가 아니라고 선전함으로써 대한인국민회의 규탄을 받았다. 신한회의 활동은 세계 언론에 보도되었고 해외의 한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미주 한인들은 파리에 직접 갈 수는 없었지만 소약국동맹회의에 적극 참여하였고 이들의 활동이 미주 지역의 신문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결과

신한회의 활동과 소약국동맹회의에서 한인들의 활동은 세계 언론에 보도되었고, 이것이 일본 언론에까지 보도되어 재일 유학생들이 계획하고 있던 2.8독립선언 준비에 영향을 주었다.

의의와 평가

미주 한인들이 한국의 독립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신한회의 소약국동맹회의 참가부터였다.

참고문헌
  • 김원용, 『재미 한인 50년사』(혜안, 2004)
  • 홍선표, 「일제하 미국 유학 연구」(『국사관논총』96, 국사편찬위원회, 2001)
  • 장규식, 「1900~1920년대 북미 한인 유학생 사회와 도산 안창호」(『한국근현대사연구』46, 한국근현대사학회, 2008)
  • 김선아,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北美大韓人留學生總會)의 조직과 활동-1920~30년대를 중심으로」(『한국독립운동사연구』70,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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