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Korean Affairs Institute |
---|---|
한자 | 韓國事情社 |
영문 | Korean Affairs Institut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세계)/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미국 워싱턴 D.C.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43년 |
---|---|
최초 설립지 | 미국 워싱턴 D.C. |
원어 항목명 | Korean Affairs Institute |
성격 | 한국 독립운동 단체 |
설립자 | 김용중 |
1943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설립된 한국 독립운동 단체.
한국사정사[한국문제연구소]는 독립운동가인 김용중(金龍中)이 1943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과 미주 한인 사회의 통합을 모색하기 위해 설립한 단체이다. 김용중은 1930년대 중후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1941년 12월 29일 워싱턴 D.C.로 가서 본격적으로 선전·홍보 활동을 시작하였다. 진주만 사건 후에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에 「일본은 언제 만족하게 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일본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기사를 투고하며 대미 선전 활동을 개시하였다. 또한 1942년 2월 27일~3월 1일 열린 한인자유대회[Korean Liberty Convention]를 준비하여 진행하였다.
한국사정사는 한국을 소개하고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943년 이래 이승만(李承晩)의 주미외교위원부를 둘러싼 갈등으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분열되었고, 미주 한인 사회는 내부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런 내부 갈등의 심화 과정에서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던 김용중이 1943년 워싱턴 D.C.로 주거지를 옮기고 한국사정사[Korean Affairs Institute]를 설립하였다.
한국사정사는 1943년 11월 22일 기관지 성격인 반(半)월간 영어 잡지 『The Voice of Korea[한국의 소리]』를 간행하였다. 창간호에는 ‘비영리 조직으로 자유에 헌신’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는데, 이는 당시 미국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면서 미국에서는 한국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였다. 특히 육군, 해군 정보기관과 국무부 등에서 한국 관련 정보가 필요했고, 주미 한인 사회 내의 한국 연구 붐이 결합되면서 여러 기관들이 조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1년 한국사정사는 『The Voice of Korea』 제265호까지의 기존 간행 분을 모아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2쪽짜리 반월간지로 시작한 『The Voice of Korea』는 1962년 4월 제271호에 이르기까지 18년 6개월 동안 부정기적으로 간행되다 중단되었다. 『The Voice of Korea』 간행을 중단한 이유는 재정난 때문이었다.
김용중은 1975년 사망할 때까지 한국사정사의 사장으로 활동했으며 간부진은 몇 차례 바뀌었다. 김용중 사후에도 한국사정사의 법인 등록은 취소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정사는 『The Voice of Korea』를 통한 보도, 선전으로 미주 한인 사회뿐 아니라 미 국무부 등에도 한국의 독립운동과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