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 학생

한자 新渡學生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세계)/개념 용어(일반)
지역 미국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정의

일제 강점기 일본의 여행권 없이 미국으로 유학을 간 초기 미국 유학생.

조미수호통상조약과 신도 학생

한민족의 미국 유학은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이후부터 이루어졌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 1902년(고종 39)까지는 망명이나 관비 유학생 및 유학생으로 미국에 간 이들이 많았다. 유길준,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김규식, 윤치호, 백상규, 이대위, 안창호 등이 있었다. 이후 1910년대 미국으로 유학 온 이들의 대부분은 중국 상하이[上海] 등지에서 배를 타고 여행권 없이 건너온 이른바 신도(新渡)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대략 500명이 넘었다.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된 후 미주 한인 사회는 미국 내 한인의 신분과 지위, 미주 한인과 미국 및 일본과의 관계를 다시 설정해야 하였다. 그런 가운데 미주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나선 것이 1910년 2월 출범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였다.

신도 학생의 울타리가 되어 준 대한인국민회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는 강제 한일 병합 후 일본 정부의 간섭을 거부하며 샌프란시스코 이민국과 교섭하였다. 그 내용은 1912년 1월 15일 성립된 이민 조례에 따라 일본의 정치 범위 밖에서 미국으로 건너오는 한인 동포들을 인도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재미 한인의 대부분이 강제 한일 병합 이전에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라는 점을 내세워 1913년 6월 발생한 헤밋(Hemit) 사건을 계기로 미국 연방정부로부터 ‘정부가 없는 미주 한인 사회의 대표기관’으로 인정을 받았다. 1914년 4월에는 캘리포니아 주정부로부터 관허 인가를 받았다.

미국 정부의 이와 같은 조치로 중국 등지에서 새롭게 건너온 한인 학생은 망명 유학생 신분으로 여행권이 없어도 대한인국민회의 보증을 받아 미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1910년대 조선총독부가 해외 유학을 억제하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유학생은 이렇게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들은 앞 시기 유학 온 이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녔다. 잃어버린 나라에 대한 설움을 안고 고국 땅을 떠나 망명객으로 온 것이었다.

신도 학생은 평안도 일대의 기독교계 학교 출신이 많았다. 이들이 중국으로 망명한 경로는 다음과 같다. 신의주에서 압록강 철교를 건너 중국 안동현에 도착해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아일랜드계 영국인 조지 쇼(George Shaw)가 운영하는 이륭양행의 기선을 타거나, 기차로 봉천, 천진, 소주를 거쳐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신도 학생의 숫자가 절정에 달한 것은 1915년 전후였는데 100여 명에 가까운 청년들이 미국으로 가기 위해 상하이에 머물렀다고 한다.이들은 거의 맨손으로 유학길에 오른 사람이었기에 미국에 도착한 이후에는 먹고사는 문제가 우선이었다. 돈을 벌 궁리를 하느라 학업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신도 학생 가운데 학업을 계속한 이들은 150여 명이었다. 신도 학생 중에는 대학에 진학한 이들보다는 노동과 영업을 하면서 미주 한인 사회 건설과 조국의 광복 운동을 후원한 이들이 더 많았다. 미주 한인들과 함께 정치 활동과 한인 단체 조직과 발전에 헌신 봉사하였고, 1930년대 이후에는 재미 한인 사회의 중추 세력이 되었다.

참고문헌
  • 김원용, 『재미한인 50년사』(혜안, 2004)
  • 장규식, 「1900~1920년대 북미 한인유학생사회와 도산 안창호」(『한국근현대사연구』46, 한국근현대사학회, 2008)
  • 정한나, 「‘무명’과 ‘무자격’에 접근하기 위하여–기록되지 않은 피식민 여성(들)의 이름(들)에 관한 시론」(『동방학지』191,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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