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Korea's First Diplomatic Mission to the 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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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報聘使 |
영문 | Korea's First Diplomatic Mission to the U.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세계)/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미국 |
시대 | 근대/개항기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883년 7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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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884년 5월 31일 |
전개 시기/일시 | 1883년 9월 18일 |
전개 시기/일시 | 1883년 10월 16일 |
원어 항목명 | Korea's First Diplomatic Mission to the U.S. |
성격 | 외교 사절단 |
관련 인물/단체 | 민영익|홍영식|서광범|유길준|변수|고영철|최경석|현흥택 |
1883년 7월 우리나라 최초로 미국에 파견된 외교 사절단.
보빙사(報聘使)는 미국의 조선 주재 전권공사 파견에 대한 답례와 개화 정책에 필요한 정보 확보를 위해 미국에 파견된 최초의 사절단이었다. 1883년 9월부터 미국에서 자주 외교를 전개하며 개화 정책에 필요한 미국인의 파견을 요청하고, 근대식 시설과 제도·문물을 살펴보았다. 보빙사 중 민영익(閔泳翊) 등은 유럽의 각국을 시찰하였다.
임오군란(壬午軍亂) 후 중국이 조선의 내정에 적극 간섭하던 1883년 5월에 미국이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근거로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루셔스 H. 푸트(Lucius H. Foote)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조선은 미국에 공사를 파견할 여건이 아닌 상황에서 1883년 7월에 미국의 공사 파견 조치에 보답한다는 명분으로 보빙사를 파견하여 독립을 보존하고 개화 정책을 추진할 방법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보빙사는 정사 민영익, 부사 홍영식(洪英植), 종사관 서광범(徐光範), 수행원 유길준(兪吉濬)과 변수(邊燧), 고영철(高永喆), 무관 최경석(崔景錫)·현흥택(玄興澤) 등으로 구성되었다. 민씨 척족의 소장 영수를 비롯해 국제 정세와 근대적 문물에 밝은 개화파 인사들이 대거 발탁된 외교 사절단이었다. 1883년 7월에 제물포를 출발하여 일본을 거쳐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했으며, 9월 18일에 미국 대통령 체스터 A. 아서(Chester A. Arthur)에게 국서를 제정(提呈)하였다. 이후 공식 행사에 국기를 게양하여 조선이 자주국임을 과시하며, 개화 정책에 필요한 외교 고문·군사 교관 등의 파견을 요청하고, 각종 근대식 제도와 문물을 시찰하였다. 10월 12일 일원 중 홍영식 등은 곧바로 귀국하고, 민영익 등은 유럽을 거쳐 1884년 5월 31일 돌아왔으며, 유길준은 미국에 남아 조선인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보빙사는 서양 국가들 중 미국을 최고의 부국강병 국가로 보게 되어 우호적인 미국관을 갖게 되었다. 귀국 후 홍영식 등의 변법 개화파는 미국을 모델로 삼아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반면 민영익은 서양식 정치 제도의 도입이 자칫 국가 체제를 흔들지도 모른다고 부정적으로 인식하며 개화파를 탄압하였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보빙사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미국과 유럽을 시찰하면서 자주 외교를 펼쳤을 뿐만 아니라, 개화 정책에 필요한 고문 등의 파견을 요청하고 각종 정보들도 수집하였다. 또한 조선 정부 내에 호의적인 미국관의 확산과 개화 정책의 추진에는 기여했지만, 개화의 방향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