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南美韓人-再移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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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세계)/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캐나다 |
시대 | 현대/현대 |
1960년대 이후 남미 거주 한인들이 캐나다로 재이주한 현상.
1960년대 이후 한국에서 남미로 농업이민을 간 한국인들은 모두 농업에 실패하였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의 한국인들은 살 길을 찾아 캐나다로 다시 이주하였다. 이들은 주로 자녀 교육과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캐나다 재이주를 결심하였다. 아르헨티나로 한국인이 대거 이주한 때는 박정희 정부가 수립된 1960년대였다. 정부는 실업을 해소하고자 남미 이민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농업이민을 떠난 대다수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줄 몰랐고 또 남미에 적합한 농사법을 개발하지 못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자 한인들은 도시로 나와 옷을 만들어 팔거나 옷 장사를 주로 하였다. 돈을 모은 한인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 캐나다로 재이주를 하였다. 브라질로 들어간 대규모 이민자들은 한국전쟁의 반공포로들이었다. 이후 1960년대 농업이민을 간 한인들은 농사보다는 옷 장사가 체질에 맞았다. 역시 옷장사로 돈을 번 사람들은 이를 밑천으로 캐나다로 재이주를 하였다. 파라과이 역시 1960년대 중반부터 농업이민을 갔으나 완전 실패로 끝나 버렸다. 그러자 일부는 아르헨티나로 건너갔고 거기서 또 일부가 캐나다로 다시 이주하였다. 캐나다로 이주한 역사를 각 국가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아르헨티나
1965년부터 한인들이 농업을 위해 아르헨티나로 본격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 이전에 10여 명의 한인이 살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에 거주한 최초의 한인은 1941년에 입국한 이차손이었다. 이차손은 1907년 원산 출생으로 6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17세에 일본 외항선원이 되어 기관부에서 일하며 세계 각지를 돌다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눌러 앉아 살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 정착한 한인은 1950년 이탈리아 태생의 남편과 함께 온 1918년생의 강영례이다. 그리고 1956~1957년에 반공포로 출신 한인 12명이 와서 2명은 한국으로 돌아갔고 10명은 정착을 하여 1965년 10월 14일에 들어온 1차 영농 이민단을 맞았다. 영농 이민단을 계기로 남미 국가에 가 있던 동포들이 아르헨티나에 몰려들어 한인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한인들은 날품팔이에서 의류와 관련된 삯일 전성시대로 접어들었고 1985년 후반부터 한국에서 당시 3만 달러를 투자하면 이민이 허용되어 대거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많이 왔다.
아르헨티나에서 캐나다로 제일 먼저 온 인물은 정창헌이었다. 정창헌은 1966년 아버지 정인기를 따라, 파라과이로 먼저 갔으나 바로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1971년 혈혈단신 캐나다로 이주해 토론토에 있는 포리스트힐고등학교를 1973년에 졸업하였다. 1975년 토론토 라이어슨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자동차 정비업을 시작으로, 자동차 보디 숍(body shop), 호텔, 쇼핑 플라자, 주택 개발, 자동차 딜러 사업 등을 30여 년간 성공적으로 운영해 재력가로 성장하였다. 틈이 나는 대로 동포 사회를 위해 각종 후원금을 기부하고 여러 한인 단체장을 역임해 왔다.
정창헌 다음으로 토론토에 온 한인은 이양섭이다. 이양섭은 1971년 아르헨티나로 갔으나 1972년 캐나다로 이주해 도넛 커피숍과 옷 가게를 운영하였다. 이양섭이 토론토에 온 이후 5~6개월 사이에 계화삼 목사와 박현 등 10여 명이 왔다. 13년간 대만 선교사를 지낸 계화삼 목사는 원래 남미 행을 결심하고 무작정 대만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관을 찾았다. 대사관에서 관광비자를 받고 1969년 아르헨티나에 도착하였다. 계화삼 목사는 공항에 마중 나온 집사 7명을 중심으로 아르헨티나 제일교회를 세웠다. 계화삼 목사는 1972년 12월 토론토 중앙연합교회 초청으로 토론토에 들렀다. 당시 이 교회는 담임목사가 없었다. 캐나다로 온 계화삼 목사는 토론토 중앙교회를 설립하여 담임목사가 되었다.
아르헨티나 출신 이민자들이 대거 토론토로 들어온 때는 1988년경으로 100여 명이 왔다. 신종기[사리원 운영], 윤현재[캐나다동포신문], 윤중열[한국일보], 박영권[실협 감사], 김홍양[한인회 이사장], 이영수[씨름왕], 박정수[한미식품], 이정남[작가] 등이 있다. 이들은 1990년 아르헨티나 동우회를 조직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우회 모임은 회원 자택 또는 공원에서 열고 아르헨티나에서 즐겨 먹던 아사도[통갈비구이]와 비노[포도주]를 곁들인 모임을 가졌다. 요즘은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모임을 지속하는 한편 교회, 단체, 동문회, 향우회원들과 어울려 캐나다 동포 사회의 구성원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2. 브라질
브라질에 한인이 처음 발을 내디딘 것은 1918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6명이 일본 국적으로 사탕수수밭에서 노예 생활을 하였다. 1953년 휴전 후 한국에서 석방된 반공포로 50명이 브라질에 정착하였다. 그 후 한국에서는 5.16 군사정부가 집권하면서부터 국책 사업의 일환으로 해외 이민을 권장하기 시작하였다. 1963년 2월 1차 이민단이 브라질에 도착하였다. 2년 후인 1966년 한국의 이민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브라질의 한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옷을 사서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파는 것으로 생활하면서 돈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한국인 특유의 근면함과 부지런함으로 현재 브라질 의류 시장의 60%를 한인들이 장악하고 있다.
브라질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잡은 일부 동포들은 보다 나은 삶과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캐나다 등 북미로 이주를 시작하였다. 브라질에서 토론토로 이주한 정착자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동포는 반공포로 출신 박정환이다. 브라질에서 14년을 살다가 1970년 토론토로 이주하였다. 지렁이 잡이 사업으로 성공해 ‘지렁이 박씨’라는 별명을 얻었고 사진관을 운영하였다.
브라질에서 캐나다로 간 선발대 중에 이상림과 형제들도 있다. 농업 이민으로 1964년 브라질에 간 이상림은 상파울루에서 2년간 살다 1966년 5월에 리자이나에 도착하였다. 동생 이상철, 이상후도 브라질을 거쳐 토론토로 왔다. 목진상은 1966년 브라질의 VASP항공사에 취직해 2년 반 동안 품질관리부에서 일하다가 3년 뒤인 1969년 캐나다에 이민 왔다. 목진상의 장인인 최기선도 브라질 출신이다. 1964년 전 가족을 이끌고 브라질로 이민 간 최기선은 1967년부터 딸이 살고 있는 토론토를 왕래하다 1979년 이주하였다
실제 브라질에서 재이민을 온 동포는 이보다 훨씬 많아 토론토 일대에만 100가구, 많게는 200 가구로 추산되고 있다. 브라질 출신 동포들이 늘어나면서 79년에는 친목회 ‘봉디아’가 탄생하였다. 브라질 말인 포르투갈어로 ‘안녕하십니까’를 뜻하는 ‘봉디아’의 회원들은 창립 이후 오랫동안 토론토 써니브룩 공원에서 여름 야유회를 가져 왔다. 캐나다로 이주한 사람들이 다 성공한 것은 아니어서 일부 동포들은 브라질로 다시 돌아가 성공하기도 하였다.
3. 파라과이
최초의 한국인 이민단이 파라과이로 들어오기 훨씬 전에 파라과이에 들어와 생활하던 한인들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1964년 10월 파라과이에 도착해 최초의 한인 교회[현 연합교회]를 창립한 한성욱 선교사다. 한성욱 선교사는 초기 한국인 이민단이 아레구아 합숙소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에 임시 숙소를 마련하여 고국을 떠나온 초기 동포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다른 한 사람은 한성욱 선교사보다 조금 먼저 파라과이에 들어온 ‘최공장’이란 별명을 가진 최재윤이다. 1963년 11월 20일 남미 쪽으로 여행을 갔다가 파라과이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후 최재윤은 1967년에 부인 진정수를 초청해 가족이 합류하였다. 이 두 사람이 양국 간 정식 외교교섭을 통해 이민이 이뤄지기 전에 첫발을 내디딘 최초의 한국인들이었다. 최재윤은 초대 노인회장을 지낸 박갑원을 도와 노인회 창립 멤버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65년 말경부터 파라과이 이민이 시작되었다. 초기 이민단 30세대 95명을 태운 배가 해군 군악대의 연주 속에 화려한 전송을 받으며 부산항을 출발한 것은 1965년 2월 17일이었다. 이민자들은 부산항을 떠난 지 66일 만인 1965년 4월 23일 파라과이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파라과이의 영농 이민 정책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당시 이민자들 일부는 아르헨티나로 들어갔다. 1966년 4~5월경에는 재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파라과이 5차 이민단 단장을 맡았던 장익순 등도 아르헨티나로 옮겼다. 파라과이로의 이민자들이 늘어난 것은 1968~1969년경이었다.
캐나다 1호는 박응렬이다. 1967년 한국을 떠나 1972년까지 월남에서 근무하였다. 아르헨티나를 거쳐 파라과이에 도착하고 6개월 후인 1973년 다시 토론토로 이주하였다. 박응렬에게 캐나다는 다섯 번째 거주국이었다. 조동식 역시 부친 조완석과 함께 1973년 파라과이에 도착해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돌다가 1978년 캐나다로 왔다. 조동식도 캐나다는 다섯 번째 거주국이었다. 파라과이 출신자들은 1982년과 1983년 사이에 캐나다로 많이 들어왔다. 파라과이 출신자들은 1983년에 이뽀나 친목회를 결성하였다 ‘이뽀나’는 현지 인디오 말로 ‘다 좋다’는 뜻이다. 이뽀나 친목회는 1976년 파라과이로 갔다가 1982년 다시 캐나다로 이주해 온 조완석, 강기영, 조대희 등이 주축이 되었다.
황해도 안악에서 출생하여 서울 정릉에서 살던 소설가 강기영은 1975년 남미 파라과이를 거쳐 1982년 토론토에 정착하였다. 이뽀나 친목회의 초대 회장은 조완석이 맡았다 그 후 조대희가 회장을 이어받았다. 파라과이 출신자들이 몬트리올과 온타리오 등지에 나눠 살게 됨에 따라 회원들은 1년에 한 번씩 킹스턴에서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