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한인의 한국 민주화운동

원어 항목명 Korean Democratic Movement of Korean Canadians in Canada
한자 -韓人-韓國民主化運動
영문 Korean Democratic Movement of Korean Canadians in Canada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개념 용어(세계)/개념 용어(개관)
지역 캐나다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원어 항목명 Korean Democratic Movement of Korean Canadians in Canada
정의

캐나다 밴쿠버에서 전개된 캐나다 한인의 한국 민주화운동.

개설

캐나다 한인의 한국 민주화운동은 밴쿠버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던 안영삼과 한인 교회를 중심으로 개헌서명운동, 광주 추모의 밤 행사, 한마당 활동 등을 통해 전개되었다.

민주화운동의 계기

1986년 1월 16일 대통령 전두환(全斗煥)은 국정연설에서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위한 ‘큰 정치’로서 임기 내 개헌 불가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어 법무부는 헌법 논의를 빙자한 범법 행위에 대해 엄벌하겠다는 방침을 거듭 천명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움직임은 1983년 2.12 총선 후 본격화되기 시작한 직선제 개헌 논의를 봉쇄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개헌 논의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1986년 2월 4일 서울대학교에서 15개 대학 1,000여 명이 모여 ‘파쇼헌법철폐투쟁대회 및 개헌서명운동추진본부 결성식’을 개최하였고, 2월 12일에는 신민당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으로 ‘1000만 개헌서명운동’을 개시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5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 가맹 23개 단체와 각계 민주 인사 303인의 이름으로 ‘군사독재 퇴진 촉구와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 선언’을 발표하였다. 개헌서명운동은 정권교체와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들의 잠재적 요구를 폭발시켰으며 온 국민의 정치적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러한 맥락으로 신민당은 3월 11일 ‘개헌추진위원회 서울지부 결성대회’를 시작으로 주요 도시에서 ‘개헌 현판식 대회’를 추진하였으며, 직선제 개헌을 바라는 수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였다. 이와 더불어 지식인·종교인·교수들의 시국 성명서가 발표되었고 이는 직선제 개헌의 당위성을 대중들에게 선전함과 동시에 직선제 개헌의 열기를 확신시키는 계기점이 되었다.

개헌서명운동

직선제 개헌을 통해 민주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열망은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던 안영삼은 ‘밴쿠버 개헌서명운동을 돕는 모임’을 결성하고 한인 교회를 중심으로 개헌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1986년 4월 19일 발표한 ‘한국의 민주화 개헌서명운동을 지지하면서’라는 성명서를 통해 안영삼은 “우리 캐나다 한인은 모국에서 우리 부모 형제가 벌리고 있는 ‘1,000만인 개헌서명운동’이 유린된 인권을 회복하는 민주 양심의 선언이며 국민이 직접 자신의 정부와 지도자를 선택하는 민주화의 핵심이며 장차 민족 통일에 접근하는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한 구국 투쟁임을 확신하고 이 비폭력의 평화적 운동을 전폭 지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개헌서명운동이 순탄하게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4월 27일 각 교회별로 서명을 진행하기 위해 교회마다 서신을 발송하고 각 교회 목사와 전화를 통해 혹은 직접 만나서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일부 교회가 교회 내에서의 정치활동을 원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교회의 태도에 대해 안영삼은 “일개 목사가 수많은 교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곳이지 정치운동 하는 곳이 아니라는 냉대에 바로 그 자신이 독재를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회개를 해야 할 것이라”고 비판하고 개헌청원서명운동을 계속해 나갈 의지를 밝혔다.

4월 21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된 1차 서명을 통해 650명의 교민과 캐나다인들이 개헌 청원 서명에 동참하였다. 밴쿠버 개헌서명운동을 돕는 모임은 5월 12일부터 15일까지 한국을 방문하는 브라이언 멀로니(Brian Mulroney) 연방 수상에게 명단의 사본과 한국에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필요하며 방한 기간 동안 개헌 문제를 제기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진 서신을 전달하였다. 이후 계속된 서명운동을 통해 2,000여 명이 넘는 교민과 캐나다인들로부터 지지를 받아냈으며 명단 사본을 멀로니 연방 수상에게 전달하는 작업을 계속 하였다. 또한 한국의 인권과 민주개혁에 대한 캐나다 정부의 관심과 한국 정부에 대한 압력을 지속적으로 요청하였다.

고국에서 민주화의 열망이 들불처럼 일어났던 6월 항쟁동안 안영삼을 비롯한 교민들은 6월 19일 ‘캐나다 밴쿠버 지역 조국 민주화를 위한 철야기도회’를 열고 ‘조국 민주화를 위한 시국 선언’을 발표하였다. 성명서를 통해 참가자들은 “지난 4·13 개헌 유보 조치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온 국민과 해외동포에게 큰 실망을 주었으며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적 합의에 대한 기만이요 배신”이라면서 “88올림픽이나 평화적 정권 이양이 개헌을 유보하는 이유가 될 수 없으며 우리 해외동포는 우리 민족이 처한 역사적 사명을 실천하는 현장에 동참할 것을 엄숙히 선언”하여 조국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표하였다.

광주 추모의 밤

개헌서명운동과 더불어 안영삼이 캐나다에서 전개한 중요 활동으로 ‘광주의거 추모의 밤’ 추진을 들 수 있다. 광주민중항쟁 5주년을 맞아 밴쿠버 한인 사회에서는 처음으로 1985년 5월 18일 100여 명의 교민들이 모여 ‘광주의거 추모의 밤’ 행사를 가졌다. ‘광주의거를 생각하는 모임’이 주최한 추도식에서는 광주항쟁에 대한 기록 영화를 상영하였으며 추모 음악으로 윤이상(尹伊桑)의 「광주여 영원히」를 들었다.

안영삼은 『민중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5년간 누적되어 온 양심상의 가책 때문에 더 이상 광주 시민들의 의거를 모른 체할 수 없다는 많은 교민들의 소리가 높고, 또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희생하고도 공산 폭도라는 누명 쓴 영령들의 원한을 우리 해외동포들도 풀어 줄 의무가 있다.”라고 추모식을 갖게 된 소회를 밝혔다. ‘광주의거 추모의 밤’은 밴쿠버 한인 사회가 광주 희생자를 추모하고 한국의 민주화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모임을 결성하는 계기점이 되었다.

한마당

1982년 정치적 목적이 아닌 인간이 진실로 인간이 되는 세상을 위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한마당’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한 안영삼은 1986년에 들어서 사회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고자 민주화운동 소식지 『한마당』을 발간하였다. 8월 8일 발간된 제1호는 제1면에 김구(金九)의 「나의 소원」을 실으면서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김구 선생이 이 글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그의 이 사상은 독선적이며 세태의 순리에 역행하는 과오라는 오해를 벗을 길이 없었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오늘날, 과연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김구 선생의 40년 예지와 그 경고가 4천만 민족의 가슴에 응어리진다.”라는 글로 조국의 민주화를 향한 마음을 담았다.

발간호는 민주헌법쟁취와 서승(徐勝)·서준식(徐俊植) 형제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고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개헌 정국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민주 헌법 쟁취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민주 헌법 쟁취는 민중의 힘으로!」, 「현행 군사 독재 헌법과 민주 헌법은 어떻게 다른가?」 등의 기사를 통해 민주 헌법에 의해 민주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자주적, 평화적 민족 통일로 향하는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서승·서준식 형제에 대한 호소문을 통해 전근대적인 반인권 악법으로 고통 받고 있는 조국의 인권 상황에 대해 비판하고 서승 형제를 비롯한 정치범의 석방을 위한 교민 사회의 지원을 강조하였다.

참고문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https://www.kdem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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