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History of Immigration of Koreans in Canad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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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人-移民歷史 |
영문 | History of Immigration of Koreans in Canada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세계)/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캐나다 |
시대 | 현대/현대 |
원어 항목명 | History of Immigration of Koreans in Canad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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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부터 시작된 캐나다 한인 이민의 개괄적 역사.
캐나다 한인의 이민 역사는 20세기 초반에 신학을 공부하려는 유학생들이 학업 수행을 목적으로 입국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이주 유학생들은 수가 적었고 정주한 유학생은 더욱 적어서 한인 이민 사회를 형성하지는 못하였다. 본격적인 한인 이주는 1962년에 캐나다 정부가 이민자 자격 요건으로 국적을 폐기하고, 1963년에 한국과 캐나다 간에 국교가 수립되고, 1967년에 점수제를 통해서 이민자를 선발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또한 1960년대 후반에 들어 1960년대 초반 독일로 갔던 광부와 간호사, 베트남으로 갔던 기술자, 브라질·아르헨티나·파라과이로 갔던 농업 이민자들이 캐나다로 재이주하면서 한인 사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한국에서 직접 캐나다로 이민 가는 사람들이 증가하였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캐나다가 투자 이민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면서 큰 자본을 가지고 이민 생활을 시작하는 새로운 부류의 한인 이민자 집단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97년 한국이 외환위기를 맞이하면서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거나 장래가 불안정해진 30대의 전문직·사무직 출신 중산층 이민자들이 캐나다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 이주하였다.
또한 1994년에 한국과 캐나다 사이에 입국사증면제제도를 실행하면서 조기 유학생과 언어 연수생들이 입국이 까다로운 미국 대신 캐나다를 선택하면서 한인 이민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이 되었다. 2004년 이후에는 이민자를 지방으로 분산하는 지역화 정책으로 중서부와 동부에 한인들이 이주하여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캐나다 인구통계 자료에 따르면 2006년 한인 인구는 14만 6550명이었는데 2016년에는 19만 8210명으로 35% 증가하였다. 2019년 외교부의 재외동포 현황에 따르면 캐나다 한인 인구는 4만 1750명으로 전 세계 재외동포의 3.23%를 차지한다. 캐나다로의 한인 이민은 다음과 같이 크게 네 가지 시기로 구분한다.
캐나다 초기 한인 이민은 미국 초기 한인 이민과 같이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민의 산파 역할을 하였다. 조선에서의 캐나다 선교는 토론토대학교 YMCA에서 파송한 제임스 게일(James Scarth Gale)이 1888년에 부산에 도착하면서 시작하였다. 게일을 위시한 초대 캐나다 선교사들은 온타리오 출신이었으나 의료 선교사 올리버 알 애비슨(Oliver R. Avison) 이후부터는 노바스코샤(Nova Scotia)와 같은 캐나다 연해 지역 출신 선교사들로 충원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캐나다 선교사들은 조선인을 기독교로 개종하는 본래의 선교활동 이외에도 의료와 교육사업을 병행하여 서양인과 서양 종교에 배타적이었던 조선인들의 신뢰를 얻었다. 가난과 압정에 시달리고 일제의 침략 앞에 주권을 상실해 가는 조선인에게 기독교는 유교와 불교와 같은 기성 종교들이 충족하지 못한 위안과 소망을 주면서 특히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들과 여성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하였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기독교에 접하고 근대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사회의 엘리트 계층으로 성장하였다.
기독교 신도가 늘어나면서 캐나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목회와 선교 역할을 분담하기 위해 조선인을 목회자로 양성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유망하고 젊은 조선인들을 캐나다로 유학을 보내 선교사 자신들이 받은 방식대로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신학 유학생의 신분으로 처음으로 캐나다에 온 사람들은 조희렴[1915년 입국], 강영힐[1919년 입국], 문재린[1928년 입국], 해롤드 최(Harold Ch’oe)[입국 일시 미상], 존스타 김(John Starr Kim)[1934년 입국]이다. 1935년과 1946년 사이에는 유학생이 끊어졌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캐나다 교회는 전후 복구 지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신학생들의 유학 후원을 재개했고 1950~1960년대에는 더 많은 신학생이 캐나다로 오게 되었다.
이들 유학생은 캐나다 선교사들이 활동하던 함경도와 간도 출신으로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교육 받으면서 선교사들과 인연을 맺었다. 이들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캐나다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귀국 후에는 선교와 교육활동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선교사의 후원으로 캐나다에 와서 초기에 정착한 한인으로는 서종욱과 황대연을 꼽을 수 있다. 그 외에도 정대위 목사, 정희수 박사, 조정원 박사 등과 같은 유학생들이 캐나다에 정착하면서 한인 이민 사회의 토대를 놓았다. 1960년대 중반까지 정착한 한인들은 주로 목사, 의사, 학자들이 대부분이라 1960년대 후반부터 입국하기 시작한 ‘거주자’ 이민자들과는 특성이 매우 달랐다. 1965년 당시 캐나다의 한인 인구는 70여 명으로 추정되고 한인 사회는 토론토에 중심을 두었다.
본격적인 캐나다로의 한인 이주는 1967년에 캐나다 정부가 이민 문호를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출신 이민자들에게 개방하면서 시작되었다. 캐나다 정부는 국가경제 발전을 위한 우수 인력을 유치를 목적으로 이민 제도를 지역별 할당제[quarter system]에서 점수제[point system]로 바꾸었다. 그 이전에는 아시아에서는 홍콩과 일본만이 이민 쿼터를 받았다. 1969년 말부터 5년까지는 서독에 계약 근로자로 파견됐던 광부와 간호사들이 캐나다로 재이주하였다. 이들의 인구는 대략 1,000명으로 알려졌다. 그 외에도 덴마크로 농업 연수생으로 갔던 유학생, 베트남으로 파견됐던 기술자,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로 갔던 농업 이민자들이 캐나다로 재이주하면서 캐나다의 한인 사회는 다양한 배경의 이민자들로 구성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 캐나다 정부는 지식경제로 재편되는 환경 변화를 맞이하여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기술력 있고 자본력 있는 이민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캐나다에 후원자가 없어도 자신의 학력과 전문 기술이 뛰어나면 이민 올 수 있는 독립 이민 문호를 확대했고, 자본력 있는 이민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투자 이민과 사업 이민을 신설하였다. 이러한 이민정책의 변화는 캐나다에 연고가 없어서 이민 올 수 없었던 한인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더욱이 1973년에 서울에 주한 캐나다 대사관이 개설되면서 이민 수속이 더욱 쉬워졌다.
또한 1976년에는 연방정부만이 관장하던 이민정책을 주정부도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권한을 양도하였다. 앨버타(Alberta)주와 서스캐처원(Saskatchewan)주와 같이 경제성장이 빠른 주와 매니토바(Manitoba)주와 같이 인구가 부족한 주에서 경쟁적으로 사업 이민자와 투자 이민자를 유치하였다. 그 외에도 뉴브런즈윅(New Brunswick)주, 뉴펀들랜드(Newfoundland)주, 브리티시컬럼비아(British Columbia)주, 온타리오(Ontario)주,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Prince Edward Island)주, 퀘벡(Quebec)주도 지역별 사업 및 투자 이민정책을 통해 자본과 전문 기술을 가진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1976년 캐나다 이민법의 개정으로 삼촌, 형제 등 친척 이민이 단절되기까지 한인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1974년부터 1976년 사이에 캐나다에 거주하는 한인은 9,449명으로 급증하였고, 특히 1974년에는 4,331명이 이민을 와서 단일 해로는 최고 증가치를 기록하였다. 그 후 1978년부터 1980년까지는 이민자 수가 매년 1,000명에도 못 미쳤고, 1981년부터 1983년까지 1,0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가 1984년과 1985년에 다시 1,000명 이하로 떨어졌다. 이후 1986년부터 사업 이민자가 증가하면서 다시 1,000명 이상으로 증가한 이민자 수는 순수 투자 이민이 증가한 1987년에는 2,000명대를 넘어섰다.
1980년대 한인 이민은 1986년까지 주로 가족 이민으로 이루어졌으나, 1987년부터 사업 이민자가 가족 이민자 수를 앞서기 시작하였다. 1988년에는 총 이민자 2,664명 중 반이 넘는 1,353명이 사업 이민자였다. 1980년부터 1991년까지 12년간 캐나다에 이민 온 한인 수는 2만 명에 육박하였다. 2000년 이후 한인 이민자는 지속해서 증가했고 매년 1만 3000명~1만 5000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캐나다에 이민 온 한인들은 대부분 온타리오 지역, 특히 토론토에 정착하였다. 그 이유는 온타리오주가 이민 노동력을 흡수할 수 있는 산업 시설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밴쿠버와 같은 서부 도시로 이민을 온 사람도 직업과 사업 기회를 찾아 토론토 지역으로 재이주하기도 하여 토론토는 캐나다 한인 사회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1997년 말의 한국의 외환위기는 국내의 고용 불안정을 심화시키면서 일자리를 잃거나 고용에 불안감을 느낀 30대가 해외 이민의 바람을 일으켰다. 1999년에 5,267명이 취업 이민으로 떠났고 2000년에는 그 수가 8,369명으로 증가하였다. 대졸 학력 이상을 주 대상으로 하는 미국과 캐나다 등지로의 취업비자 발급 건수도 급증하였다. 2003년 8월 한국의 한 티브이(TV) 홈쇼핑업체에서 매니토바주 사업 이민 상품이 인기를 끌어 순식간에 수천 명이 몰리는 이민 열풍이 불기도 하였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캐나다로 떠난 30대 중산층 이민자는 과거 1960~1970년대의 이민자에 비교해서 ‘준비된 이민자’이다. 이들은 전산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갖추고, 거주국 사정에 대해 미리 정보도 수집하고, 최소한 2만~3만 달러 이상의 정착금을 가지고 출발한다. 그런데도 이들 중 많은 사람이 현지 사회에서 취업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고 그로 인해 저소득, 가정불화, 스트레스 등 사회부적응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언어 문제와 현지 사회 경력 부족이 취업 문제의 주요 원인이다. 다행히 자신의 전문 분야에 취업하더라도 상사와 동료와의 의사소통 문제로 인해 적응하지 못하고 자의 반 타의 반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도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이로 인해 수년간 직업을 찾다가 실패하고 결국에는 자신의 분야와는 동떨어진 자영업으로 귀착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자녀 교육과 영어교육은 한국에서 항상 중시되었는데 1990년대 이후 한국 정부의 세계화 정책과 한국인의 생활수준 향상으로 인해 조기유학과 영어 해외 연수 교육이 증가하였다. 1994년 5월 한국과 캐나다 사이에 한국인에 대한 입국사증 면제가 발효되면서 미국에 비교해서 비교적 입국이 자유롭고 교육비와 생활비가 저렴한 캐나다로 유학과 어학연수 목적으로 많은 수의 학생들이 입국하였다. 이들은 단지 단기간 교육 목적으로 체류하기 때문에 재외동포라기보다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강하고 한인 동포들과 공감대가 별로 없어서 서로 간의 접촉이 활발하지 않다. 그러나 이들은 무시할 수 없는 경제력으로 인해 토론토와 밴쿠버 등지의 한인 커뮤니티의 한인 업소, 하숙집, 어학 연수원 등의 주요 고객이다.
캐나다 정부는 이민자들이 토론토, 몬트리올, 밴쿠버와 같이 대도시로 집중하는 것은 막고 지방으로 분산하기 위해 개별 주들이 자체적으로 이민자를 선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주정부 이민 프로그램[Provincial Nominee Program]이라고 하는데, 취업 후 이민, 유학 후 이민, 투자 이민, 사업 이민 등의 방식으로 각 주에서 필요로 하는 해외 인재를 선발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지역화 이민정책으로 인해 위니펙(Winnepeg)이 2004년에 한인이 가장 많이 이민한 도시가 되었고, 뉴브런즈윅과 같은 동부 해안 도시에 한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치열한 대학입시 경쟁을 피해 자녀가 캐나다에서 조기유학을 하도록 가족이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사는 기러기 가족이 증가하였다. 대체로 어머니와 자녀가 캐나다에 남고 아버지는 한국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캐나다로 보내고 정기적으로 캐나다를 방문해서 가족과 상봉한다. 자녀가 대학에 입학하면 어머니가 한국으로 귀환해서 기러기 가족은 종료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머니가 영주권을 취득하고 캐나다에 눌러앉아 기러기 가족이 장기화하기도 한다. 기러기 가족은 독신 신분의 한인 유학생과 영어 연수생과는 달리 가족이고, 장기 거주하고, 경제력이 크고, 교회 등 한인 사회에 활발하게 참여해서 캐나다 한인 사회에서 중요한 인구 집단이다.
기러기 가족은 모국과 거주국이 동시에 긴밀히 연결되는 초국가주의의 한 형태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 특히 인터넷 기술의 발달과 한류의 전 지구적 확장은 해외에 사는 재외 한인이 모국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소통하고 연계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였다. 21세기 캐나다로의 한인 이민은 초국가적인 인구 이동으로 한국에서 캐나다에 이민해서 정착하는 일방적인 흐름이 아니고 수시로 왕래하거나 귀환하기도 하는 쌍방향의 흐름이다. 1970~1980년대처럼 대규모의 한인 이민이 일어나기는 어려워도 한국과 캐나다 양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변화, 그리고 고령화와 같은 한인 이민자의 생애주기 변화로 인해 지속해서 이민과 귀환 이민이 발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