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Korean Americans and the Unification Iss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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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美州韓人-統一問題 |
영문 | Korean Americans and the Unification Issue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세계)/개념 용어(개관) |
지역 | 미국 |
시대 | 현대/현대 |
원어 항목명 | Korean Americans and the Unification Iss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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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 통일을 위한 재미 한인 사회의 통일운동.
통일운동은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재외 한인 개인과 단체가 통일 의지를 확산하고, 통일 기반을 조성하여 통일에 기여하려는 일체의 운동을 의미한다. 재미 한인 사회의 통일운동은 모국과의 관계에 있어 친한, 친북, 그리고 중립의 표방 등 3개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통일운동의 전개는 한반도 분단 및 이념적 갈등과 연계되어 있으며, 재미 한인 사회를 통합이 아닌 분열로 이끄는 요인이 되고 있다. 재미 한인들은 미국에 정착하여 개인적 삶과 번영을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분단된 조국의 문제에도 관심을 표명하고, 일부 인사들은 단체활동을 통해 민주화 및 통일 문제에 대해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미국 내에서 한반도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 정부에 개인 및 단체의 의견을 전달하거나 일반 여론을 환기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남한과 북한의 상호이해를 증진시켜 대립의 완화, 미국과 북한의 관계 개선, 북한에 대한 각종 지원활동을 전개해 왔다. 그리하여 재미 한인들과 단체는 통일을 위한 가교 및 지렛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펼쳐 왔다.
재미 한인 사회에서 통일운동의 중심에는 개인이 아닌 단체들이 자리하고 있다. 광복 이후 1972년 10월유신 선포까지 재미 한인 사회에서 김용중의 중립화통일론(中立化統一論), 최봉윤의 남북 합작 등 개별적인 의견 제시 이외에 조직적인 통일운동은 없었다.
1972년 선포된 10월유신의 반대 운동을 위해 1973년 7월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미주본부[이하 한민통 미주본부]가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재미 한인들이 중심이 된 민주화운동 조직의 출발점이었다. 한민통 미주본부는 1977년 보수와 진보를 망라한 전국적 단일조직을 지향하며 한국민주화연합운동[이하 한민연]으로 재편하였다. 1979년 한국에서 민주주의 국민연합이 결성되면서 한민연은 단체 명칭을 민주주의 국민연합 북미지부로 개칭하였다. 한편 한민연의 전국적 재편 작업에 반대한 임창영, 노광욱 등이 이탈하여 1977년 6월 뉴욕의 15개 운동 단체와 개인들이 참여한 미주민주국민연합[이하 미주민연]을 출범시켰다. 이 두 단체의 차이는 한민연은 한국의 민주화를 우선시하고 주한미군의 철수를 반대한 반면, 미주민연은 한국의 민주화가 진척되지 못하는 것은 분단에 그 원인이 있다고 간주하면서 민주화보다는 통일운동의 추진에 중점을 두었다. 미주민연은 한반도 통일을 위해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하는 급진적인 통일운동을 전개했지만 적절한 대중 노선과 전략의 부재, 동포 사회의 보수적인 분위기 등으로 인해 1987년 8월 해체되었다. 1970년대 재미 한인 단체들은 한반도 통일 문제보다는 남한의 독재정권 및 민주화 문제와 연관된 활동에 치중하였다.
1987년 2월 통일운동 전문 단체를 표방하면서 조국통일북미주협회[이하 통협]가 결성되어 양은식이 친북(親北) 성향의 대표가 되었다. 통협은 북한을 민족의 일부로 만나야 된다는 신념을 갖고 대화 및 교류의 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통협은 북한과 공식적인 관계를 갖고 출범한 미주 최초의 단체로서 개신교 목사들이 참여하여 북한을 방문하거나 북한의 해외동포원우회를 파트너로 삼아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단체는 1989년 평양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대표단 및 참관단 파견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통협은 기관지 『조국』을 발행하고, 북한 영화 및 비디오의 보급, 조선 미술작품 전시회의 개최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하여 북한 알리기 운동에 전념하였다. 1988년 핀란드에서 개최된 ‘주체사상과 조국통일에 관한 북한과 해외동포학자대회’에 통협 회원들이 참여하였다. 통협은 재미 한인 사회의 대표적인 친북 운동 단체로 1997년 해체되었다. 미주민연과 통협은 조국 통일을 주장하면서 북한과의 교류 및 연대를 중시하여 회원들이 북한을 공식 또는 비공식으로 방문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재미 한인 사회 내에서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남북한 사이에서 교량적 역할과 촉매의 역할을 하는 한편, 북한이 재미 한인 사회를 이해하고, 외부 세계에 북한을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5.18민주화운동’의 수배자인 윤한봉이 1981년 미국으로 밀항하여 생활하면서 1984년 1월 1일 미주 청년운동의 활성화를 목표로 재미한국청년연합[이하 재미한청연]을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전국적 조직으로 성장했으며, 민족교육과 문화운동, 그리고 평화운동을 미주 한인 사회의 주요 과제로 설정하고 한반도에서 미국 핵무기 철거, 주한미군 철수, 평화협정 체결, 남북한 군비축소 등을 촉구하는 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재미한청연의 반독재투쟁, 남한에서 핵무기 철거와 주한미군 철수 등의 통일운동은 재미 한인 다수로부터 환영받지 못하였다. 민족의 통일과 단결을 위한 재미 동포 대회를 시작으로 정기적인 전국 대회를 갖고 주제 발표와 토론, 학습을 통해 인식의 통일을 이루어 내었다. 재미한청연의 특징은 남북한 정부 및 운동 단체와 관계없이 미주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중립적·독립적인 활동을 펼쳐왔다는 점이다. 한국 대법원은 1993년 재미한청연의 활동에 대해 이적 단체로 규정하였다. 1987년 8월 윤한봉은 한인들과 함께 한겨레운동 재미동포연합[이하 한겨레]을 결성하였다. 재미한청연이 청년 조직인 반면, 한겨레는 36세 이상의 동포들을 회원으로 하는 중장년층 조직체이며, 활동 목적은 재미한청연과 동일하다. 2008년 4월 5일 재미한청연은 한겨레와 통합하여 활동을 종료하였다.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 독일의 통일 등 국제 정세의 변화, 그리고 1998년 등장한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북한과의 직접적인 교류와 협력 등은 미국에서 통일운동의 필연성을 약화시켰다. 이러한 요인은 재미 한인 단체의 통일운동에 변화를 가져왔다. 재미 한인 사회에서 민주화운동은 쇠퇴하였지만 통일운동은 분화되어 전개되었다.
1994년 10월 29일 창립된 미주동포전국협회[이하 동포협회]는 재미 한인의 민권 보호, 타 인종과의 협동과 이해 증진, 문화 발전, 한국의 평화적 자주 통일 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해체를 촉구하는 운동을 포함하여 평화 토론회 개최, 코리아 반도의 평화 정착 관련 토론회, 4.29사태와 재미 동포 사회에 관한 공개 토론회 개최, 코리아 반도 핵문제 관련 학술 토론회 등을 통해 미주 한인 동포들의 권익신장과 코리아 반도 평화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동포협회에 참여한 인사들의 다수가 재미동포전국연합회(Korean American National Coordinating Council)[이하 동포연합]에 가입하여 1997년 1월 3일 뉴저지주에서 하나의 코리아를 만들자는 명분으로 미국 최대의 친북 단체가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한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촉진하고자 교육, 봉사, 문화, 연대 활동을 펼치는 비영리 민간단체이다. 산하기관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여성회와 주미 주체사상연구소가 활동하고 있다.
1998년 재미 한인 가운데 친북 인사를 중심으로 자주민주통일연합[이하 자주연합]이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남한의 친북 통일 운동권과의 연대, 남한에서의 통일운동에 대한 관심 표명을 주된 활동의 목표로 삼았다.
1970~1990년대 재미 한인의 통일운동 단체들은 몇 년 활동하다가 남한 또는 북한 정세의 변화, 참여 인사들의 변화가 있으면 해체되거나 새로운 명칭의 단체로 변모하는 것이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반면 재미한청연은 2008년 해체되기까지 24년 동안 단체 명칭을 변경하지 않고 활동하였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재미 한인 통일 단체들의 활동은 활기를 띠었다. 2001년 동포연합, 자주연합, 동포협회 등 3개 통일 단체는 재미민족운동단체협의회의 산하단체로 들어가 연대활동의 체제를 갖추었다. 1988년 결성된 미주청년조국통일협의회[이하 청협]는 1990년 통협이 주도하였던 미주범민연에 청년 단체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자 청협은 6.15남북공동선언의 미주 지역 실천을 위한 새로운 활동을 위해 2001년 해체하고, 통일맞이 나성포럼으로 재조직되었다.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이하 민화협]는 통일 문제에 대한 동포 사회의 합의 기반 확대, 해외 동포와 함께하는 평화통일 운동의 전개, 한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촉진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민화협의 미국 협의회는 2007년 3월 LA 협의회를 기점으로 뉴욕, 워싱턴 D.C., 동남부,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등 6개 협의회가 설치되어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첫째, 통일운동의 전개는 지리적으로 한인들이 다수 살고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둘째, 재미 한인의 통일운동 단체는 각종 통일 및 남북한 관련 모임, 학술 대회 등을 개최하였으며, 세미나, 기독교인 모임, 시민사회 운동, 저술, 언론 기고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셋째, 통일운동 단체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남북을 연결하는 가교, 교량 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넷째, 단체의 특성상 친한, 친북 또는 중립적 성향을 표출한 결과 동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야기하였다. 다섯째, 정치적으로 남북한의 교류가 단절되어 있던 시기에 동포 단체들이 주도하여 남한의 지식인, 종교인 또는 북한의 인사들과 단체 회원, 해외 동포 인사 및 단체 대표들을 초청하는 모임을 개최하여 상호간 의견 개진을 통해 통일 문제와 관련한 인식의 공통성 및 차이점을 확인하였다. 여섯째, 재미 한인 사회에서의 통일운동은 일반적인 사회운동처럼 체계화된 대중적 조직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여러 단체나 조직이 결성되기는 했지만 소수의 활동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동포 사회 한인들의 참여는 미흡하였다. 일곱째, 통일운동 단체들은 미국 내에서 작은 규모의 소수민족 집단이기 때문에 통일 관련 활동이 미국 내 언론이나 일반 여론의 주목을 크게 받지는 못하였다. 여덟째, 재미 한인 사회에서 통일을 위한 활동이 중단되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지속되어 왔다는 사실은 한인 동포들이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통일 문제를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재미 한인 사회에서 전개되었던 통일운동 단체는 그 규모, 조직, 영향력 면에서 미미하였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통일에 대한 관심의 유지는 한민족 전체의 발전과 통일을 위하여 의미 있는 활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