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History of Immigration of Koreans in the United States |
---|---|
한자 | 美國韓人-移民歷史 |
영문 | History of Immigration of Koreans in the United State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세계)/개념 용어(개관) |
지역 | 미국 |
시대 | 현대/현대 |
원어 항목명 | History of Immigration of Koreans in the United States |
---|
19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미국 한인의 이민사.
2019년 재외동포 현황 통계에 따르면 재미 한인은 약 254만 명으로 전 세계 재외동포 750만 명의 34%를 차지하는 가장 큰 재외동포 집단이다. 이민의 역사는 19세기 중엽부터 시작한 중국과 러시아의 한인에 뒤지지만 20세기 초부터 시작한 재미 한인의 이민은 120년의 연륜이 쌓였다.
한인의 미국 이민은 19세기 말 미국이 조선과 정치, 경제적으로 관련을 맺으면서 형성된 관계 속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은 1882년(고종 19)에 제물포조약을 체결하고 미국과 외교 및 통상 관계를 시작하였다. 조선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를 억제하는 방안으로 미국과 관계를 강화하려 하였는데 한인의 하와이 이민은 그 목표를 이루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1902년에 이민원을 설립하고 하와이로 한인 이민을 추진하였다.
최초의 공식적인 이민은 1903년 1월 13일 증기선 갤릭호를 타고 102명의 한인이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면서 시작하였다. 초기 한인 이민은 고국에서의 정치·경제·사회적 혼란과 재난과 같은 배출 요인,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서의 노동력 부족과 같은 흡인 요인, 그리고 이 두 요인을 연결한 의사 선교사 호러스 알렌(Horace Allen), 사업가 데이비드 대쉴러(David Deshler), 목사 조지 존스(George Jones)와 같은 중개인들에 의해 이뤄졌다.
초기 한인 이민자들의 대부분은 20대의 젊은 남자들이었고 여자 비율은 10%에 못 미쳤다. 이들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계약 노동자로 일하면서 빠른 시기에 큰돈을 벌어서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려는 임시 체류자의 성격이 강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받은 임금에서 숙비, 식비 등을 제외하고 나면 저축할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미국에 머물 수밖에 없는 독신남성들이 성실한 노동자가 되게 하려는 방안으로 백인 농장주들은 사진결혼(寫眞結婚) 제도를 이용해서 가정을 이루게 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총 1,000명의 한인 여성들이 사진 교환을 통해 하와이에 입국하면서 재미 동포 사회는 단신 이민자 사회에서 가족 중심 사회로 변모하게 되었다. 남자들은 가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게 되면서 더 많은 수입을 벌기 위해 농장을 떠나 호놀룰루로 이주해서 자영업, 쌀농사, 고구마 농사 등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 본토에서 철도 건설장이나 과수원에서 일하면 하와이보다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1903년부터 1915년까지 총 1,087명의 한인이 본토로 이주하였다.
초기 한인 이민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집단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미국으로 건너간 정치 망명자들이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541명가량이 학생의 신분으로 미국 대학에서 공부한다는 명목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서재필(徐載弼), 안창호(安昌浩), 이승만(李承晩), 박용만(朴容萬), 김마리아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서 한인 사회의 지적·정치적 지도자로서 부상하였고 해외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렇게 노동자, 사진 신부, 유학생들로 구성된 미국의 한인 사회는 1945년 한국이 광복되기까지 하와이에 6,500명가량, 그리고 미국 본토에 3,000명가량이 있었으며, 이들은 미국 주류사회로부터 고립된 생활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한국전쟁 이후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의 흐름은 국제결혼 여성, 입양아, 유학생들에 의해서 이어졌다. 이들의 이민은 전후에 미국이 한반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면서 강화된 한미 간의 군사적, 정치적, 문화적 관계 속에서 시작되었다. 1950년부터 1964년까지 6,000명가량의 여성이 미군의 배우자로서 미국으로 건너갔고, 1950년부터 2000년까지 미군의 부인으로 이민 온 한인 여성들의 수는 10만 명에 달하였다. 1950년대에는 이들이 전체 한국인 이민자의 36%를 차지하였고, 1960년대에는 42%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이민자 집단이었다.
두 번째로 중요한 이민자 집단은 입양인이었다. 한국전쟁으로 많은 전쟁고아와 혼혈아들이 생겨나자 정부는 1954년에 해외 입양 사업을 시작하였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는 고아들이 주로 입양되었으나 1970년대부터는 미혼모 아이들이 고아들보다 많이 입양되었다. 1954년 이후 2002년 말까지 해외로 입양된 아이들은 15만 명으로 추산되고, 이 중 약 10만 명이 미국 가정에 입양된 것으로 알려졌다.
세 번째로 중요한 이민자 집단은 미국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하려고 건너간 유학생들이다. 1945년부터 1965년까지 6,000명가량의 유학생이 학위 취득 후 고국에서 누릴 사적 권위와 출세에 대해 기대를 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에 눌러앉거나 끝내 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미국에 정착하였다.
하와이와 캘리포니아로의 한인 이민은 노동자, 사진 신부, 유학생, 정치 망명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뉴욕, 뉴저지와 같은 미국 동부 지역으로의 한인 이민은 1920년대 컬럼비아대학교와 뉴욕대학교 등에 유학 온 학생들과 독립운동 지도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시기 학생 신분이 아닌 한인에는 전문직 종사자, 사업가, 미군과 결혼한 한인 여성, 한국 영사관 직원들이 있었다. 한인 유학생들이 한인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고 1960년에 맨해튼에 뉴욕 한인회를 창립하였다. 1960년대 중반 미국 「이민 및 민족법」이 개정되면서 입국한 신이민자들이 자영업에 종사하면서 뉴욕의 플러싱 한인타운이 한인 사회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1965년 미국 「이민 및 민족법」이 크게 개정되면서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개정된 「이민 및 민족법」에 따라 유학생, 객원 간호사와 의사의 신분으로 미국에 건너온 한인들이 영주권을 취득하게 되었고 1965년부터 1970년 사이의 한인 이민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후에 국제결혼을 한 한인 여성들과 함께 한국에 남은 가족을 초청하면서 1970년대에 들어서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한 한인 이민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1970년 초부터 본궤도에 올라서 연 3만 명가량의 한인이 미국에 이민하였다. 한인 이민의 정점을 이룬 1985년과 1987년 사이에는 연 3만 5000명의 한인이 이민하여 멕시코와 필리핀 다음으로 미국에 이민을 많이 한 3대 이민국이 되었다. 하지만 한인 이민은 1987년의 3만 5849명을 기점으로 해서 줄어들기 시작해서 1999년에는 단지 1만 2301명만이 이민을 해서 1972년 이후로 최저점을 기록하였다. 미국에 한인 이민이 감소하는 동안 오히려 1980년대 말부터 한국으로 귀환하는 한인들이 늘어나고, 아시아 개발도상국에서 이주민들이 유입하면서 한국은 더는 이민 송출국이 아닌 이민 수용국으로 변모하였다.
1965년 이후 미국에 이민 간 한인들은 그 이전의 한인 이민자들과 비교해서 구별되는 사회경제적 특성들을 갖고 있다. 첫째, 처음부터 정주를 목적으로 가족이 함께 이민하였다. 둘째, 한국에서 대학 교육을 받고 전문직, 사무직 등에 종사한 신중간 계층이 다수를 이뤘다. 셋째, 이민 동기가 고국에서 실업 및 빈곤과 같은 배출요인이라기보다 미국에서 기대되는 높은 삶의 질과 교육 기회와 같은 흡인요인이었다. 넷째, 이민하기 전 이미 지방에서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로 이주를 경험하였다. 이렇게 이민 전에 이미 지리적, 계층적 신분 상승의 경험을 하였고 미국 대중문화에 익숙하였기 때문에 미국의 대도시 자본주의 체제에의 적응은 그다지 생소한 과정은 아니었다. 이런 특성들로 인해 신이민자들은 빠른 기간 내에 중산층으로 진입하고 그들의 자녀들은 고등교육을 받고 전문직으로 진출할 수 있다.
한인들의 ‘아메리칸드림(American dream)’에 대한 환상은 1992년 4월 29일 로스앤젤레스 사우스 센트럴(South Central)에서 발생한 인종 폭동으로 깨지게 되었다. 자본력과 영어 능력이 부족하던 한인들은 임대료가 싸고 사업 경쟁 상대도 적은 저소득 흑인 지역에서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동네에서 돈을 벌면서 기여하지 않는 한인 상인들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던 흑인들은 한인 상인들에 대해 반감을 갖고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1991년 3월 로스앤젤레스 사우스 센트럴의 한인 청과물 가게에서 흑인 여성 고객이 한인 주인에게 총격을 받고 사망한 사건은 곧바로 한인 업소에 대한 불매운동으로 이어졌고, 1992년 4월 29일 사우스 센트럴에서 인종 폭동이 발생하였을 때 한인 업소들이 집중적으로 공격을 당하게 된 빌미를 제공하였다. 방화 또는 약탈 피해를 본 전체 4,500개의 업소 중에서 한인 소유는 2,300개였고, 전체 10억 달러의 재산 피해 중 한인이 당한 것이 4억 달러에 달하였다.
4.29폭동은 한인들에게 엄청난 재산 피해와 심리적 외상을 입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인의 정치의식과 정치참여를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4.29폭동을 계기로 동포 1.5세와 2세가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고 한인 사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부모 세대가 피해를 봐도 언어 문제와 정치력 부재로 자신들을 방어하지 못하는 것을 목격하고서 한인 사회의 대변자로서, 그리고 한인 사회와 흑인 사회, 백인 주류사회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정치력 향상에 힘을 쓰기 시작해서 한미연합회[Korean American Coalition], 한인 정치 지도자 포럼, 유권자 운동 등을 통해서 한인의 정치력을 강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한국이 1998년에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새로운 장을 열어갔다. 갑작스러운 구조조정으로 발생한 실업과 고용불안정을 피해 대학 졸업자, 전문 기술직 종사자들이 미국에 이민하였고, 이들의 규모는 2000년대에는 연간 2만 5000명에 달하였다. 처음부터 정착을 목적으로 이민하기보다 대학원, 인턴십 및 영어 교육, 단기 취업을 목적으로 입국하였다가 영주권을 취득하는 방법으로 법적 신분을 조정해서 정착하였다. 따라서 최근 한인 이민에서 처음부터 정착하려고 입국한 사람들의 수는 감소하고 신분 조정을 통해 정착한 사람들이 한인 이민자의 다수를 차지한다.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의 역사가 120년에 달한 만큼 장기화하면서 미국의 한인 사회는 내부적으로 중요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이민 1세의 비율이 감소하고 미국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2세, 3세의 비율이 증가하고 이들이 한인 사회의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한인 2세, 3세는 부모 세대의 이민자로서의 불리함과 제약을 뛰어넘어 미국 주류사회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다. 언어와 문화적 지식, 교육, 직업, 소득 등에서 한인 2세, 3세는 타 인종과 민족 집단과 비교해서 높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보인다. 하지만 타 인종·민족과의 족외혼의 비율이 50%를 넘고, 한인으로서의 종족 정체성이 약해지는 측면이 있다. 미국 주류사회에서 제공하는 권리와 기회를 충분히 향유하면서도 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미래 한인 사회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