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Korean Democratization Movement by Korean America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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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美國韓人-韓國民主化運動 |
영문 | Korean Democratization Movement by Korean Americans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개념 용어(세계)/개념 용어(개관) |
지역 | 미국 |
시대 | 현대/현대 |
원어 항목명 | Korean Democratization Movement by Korean America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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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동부 지역 한인 동포 및 단체들의 한국 민주화운동.
미국 한인의 한국 민주화운동은 1970년을 전후로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4.19혁명, 5.16군사정변, 10월 유신 체제, 5.18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 한국의 역사적인 사건과 그 궤적을 같이하며 활발히 나타났다. 특히 1970년대부터 1980년대 북미 동부 지역에서 김대중(金大中)을 중심으로 민주화 단체가 형성되면서 본격적인 운동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미주 한인의 한국 민주화운동의 근원을 알기 위해서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한인 사회의 형성과 특성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요 지역으로는 동부의 워싱턴 D.C., 서부의 로스앤젤레스, 남부의 마이애미, 중부의 시카고, 북부의 보스턴이다. 우선 동부의 워싱턴 D.C.는 세계의 정치가 집중된 곳이다. 서부의 로스앤젤레스는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모여 살았으며 농업이 주산업이었다. 남부의 마이애미는 관광업이 활발하였고, 중부의 시카고는 대표적인 공업 도시이다. 북부의 보스턴은 교육 도시로 유학생이 많이 거주하였다는 특성이 있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에 따라 한인 동포들이 추구하는 생활 모습과 민주화운동의 전개도 차이가 있었다.
독립 후 한국에서는 민주주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3.15부정선거, 5.16군사정변 등 일어나서는 안 될 일로 헌법과 정의가 좌절되는 순간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희망을 잃은 젊은 청년 학생들은 민주주의 자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로 유학을 가는 열풍이 일기 시작하였으며, 자연스럽게 워싱턴 D.C. 근교에 집중적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유학생들은 조국의 독재에 항거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한국에서 3.15부정선거에 의해 4.19혁명이 일어났으며, 이를 주시하던 워싱턴 D.C. 지역 유학생 중 이석희, 이홍규, 신정 등은 당시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 양유찬을 찾아가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이에 양유찬은 사의를 표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군정 연장, 3선 개헌 등에 의한 장기 집권이 나타남에 따라 미국 한인 사회에서는 이에 대한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반대운동을 확산시켰다. 하지만 당시 정부 친화적이던 워싱턴 D.C. 지역 한인회장 노진환은 한국의 주요 언론사에 개헌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한인 사회는 즉각 노진환에 대한 불신임을 결의하고 한인회 이름으로 3선 개헌 반대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1965년 「이민 및 민족법」 개정에 따라 한인 사회는 급속도로 확장되었으며, 신앙심이 강한 동포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개척되었다. 한국은 엄격한 군사 통치로 통신과 언론이 통제되어 자유롭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한인들은 교회를 통해 모국의 소식을 전하였다. 워싱턴 D.C. 지역의 경우에는 라디오, 티브이, 신문 등의 보급이 보편화되지 않았고, 국제전화 또한 수월하지 못한 상황에서 군부의 검열까지 있었기 때문에 고국의 소식을 듣기란 더욱 어려웠다. 이에 따라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씩 이광재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한국말 라디오방송이 시작되었고, 반정부 운동을 하는 한인들을 중심으로 일주일에 한 번 발행되는 워싱턴 D.C. 지역 최초 동포 자체 발행 신문인 『한민신보』가 발행되면서 조금이나마 고국의 소식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생겼다.
고국의 군사독재가 장기화됨에 따라 워싱턴 D.C.에서는 유학생회, 한인회, 교회협의회, 민주동지회, 각 향우회, 동창회 등 여러 유형의 단체들이 형성되었다. 그러면서 단체 나름대로 미국을 비롯해 일본, 유럽, 남미 등의 단체와도 교류하면서 한국을 어떻게 민주화 사회로 전환시킬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활발히 하였다. 고국의 민주 회복을 위해 한인 단체들이 광범위하게 조직되고 있었던 것이다.
1972년 10월 박정희(朴正熙) 정권에 의한 비상계엄령이 선포됨에 따라 워싱턴 D.C.에서는 11월 5일 듀퐁서클에서 민주수호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김상돈, 임창영, 전규흥, 장성남 외 400여 명의 한인 인사들이 참여한 대규모 집회였다. 5.16군사정변 당시 육군 소장 6군단장이었으나 끝까지 5.16군사정변에 반대하다 결국 미국으로 망명한 김웅수 교수가 주관하였다. 비상계엄령 즉각 해제, 헌정 복귀, 1인 영구 집권을 위한 헌법 개정 철회, 민주 인사 및 가족 보복 금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으며, 유신에 반대한 최초의 집회였다.
1971년 한국 대통령 선거 후 김대중은 탄압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워싱턴 D.C.에 망명하였으며, 민주화의 뜻을 같이하는 교수, 학자, 학생, 동포들과 함께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를 발족하였다. 1972년 7월 6일 워싱턴 D.C.에서 결성되었고 김대중이 초대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를 중심으로 미주 각 지역의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는 한인들이 워싱턴 D.C.로 모여들었으며, 미국 정치의 주요 인사들이 한국 민주화를 위한 정책, 정보 등을 수집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당시 대표적인 인물로는 하비(Harvey) 목사, 조 바이든(Joe Biden) 현 대통령, 문동한 목사, 제임스 T. 렌니(James T. Laney) 전 주한 미국 대사, 토마스 M. 포글리에타(Thomas M. Foglietta) 의원, 에드워드 무어 케네디(Edward Moor Kennedy) 상원의원, 스티븐 코스텔로(Stephen Costello), 안병국 목사, 신대식 목사 등이 있다. 이후 7월 10일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일본지부를 결성하기 위해 일본에 입국한 김대중은 8월 8일 한국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되었다. 이에 7월 15일에 결성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일본지부를 통해 미국과 일본의 한인들의 유신 반대 민주화를 위한 시위를 이어 나갔다.
1979년 12.12사태로 신군부 세력이 등장함에 따라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에서는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 전두환(全斗煥)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에 대한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미국의 한인 사회에서도 1980년 5월 22일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 미주 각 언론에서 광주의 상황을 알렸다. 광주항쟁이 알려지자 미국 대도시별 호남 향우회가 주축이 되어 운동을 이어 나갔다. 일례로 시카고에서는 6월 4일 로렌스의 동포 집거지인 알마니 광장에서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대한 규탄 대회를 벌였으며, 당시 약 500여 명이 참석하였다.
한편 1980년 9월 1일 김대중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으면서 워싱턴 D.C.의 동포 및 단체들은 한국 민주화와 김대중 사형 집행 정지 구명운동을 통해 미국과 국제사회에 알렸다. 특히 레이건(Reagan) 대통령 정부의 구명운동 압력에 전두환 정권은 사형 집행을 못 하게 되었고 백악관과의 절충을 시도하여 특별사면 조치하였다. 이후 김대중은 1982년 12월 제2차 망명하여 워싱턴 D.C.에서 생활을 이어 나갔다.
김대중은 1985년 2월 6일 귀국할 때까지 워싱턴 D.C.를 근거지로 활동하였으며, 대표적으로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설립하였다. 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미 연방정부와 버지니아주 정부에서 비영리단체로 승인받아 미주 각 대도시에 한국 민주화운동 동포들을 중심으로 지부를 설립하여 공식적으로 활동한 단체이다.
6월 항쟁은 박종철(朴鍾哲) 고문치사 사건, 4.13호헌조치, 이한열(李韓烈)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운동이다. 6월 29일 노태우(盧泰愚)의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 대해 한인 사회에서도 그 궤적을 같이하였다.
1987년 2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미국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반인권적 군사정권이 연장됨에 따라 한인 사회에서는 조국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되었고, 4.13호헌조치의 반작용에 대한 우려가 터져 나오면서 직선제 개헌에 대한 적극적인 운동을 펼쳐 나갔다. 당시 한국인권문제연구소의 소장이던 유종근은 ‘직접 선거만이 한국 정치의 진정한 희망’이라는 요지의 글을 『아시아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하였으며, 한인 교수 39명이 시국 선언문을 작성하고 서명하였다.
1987년 5월에는 미 동부 민주 단체들이 한국 민주화의 뜻을 모아 5월 31일 백악관 앞 라피엣 공원에서 총궐기대회를 주최하였다. 당시 민주 단체들은 이념의 차이로 내부적인 연대성이 취약한 편이었으나 오로지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뜻을 하나로 합쳐 처음으로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400여 명이 참여하여 백악관에서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관까지 행진하며 구호를 외치고, 문동석 총영사에 성명서를 전함으로써 한인들의 민주화에 대한 의사를 전달하였다.
1987년 6월 이한열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면서 한인들의 민주화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더욱 증폭하였다. 각 도시에서 한인들의 자발적인 시위가 조직되었다. 워싱턴 D.C.에서는 5월에 이어 두 번째 백악관 앞 집회를 준비하였다. 6월 28일 ‘조국을 위한 대기도 및 궐기대회’라는 이름으로 열린 집회는 워싱턴 D.C. 민주화 시위 사상 최대 인원인 1,000여 명이 참여하였으며, 국무부까지 도보 시위를 하면서 한인들의 민주화에 대한 의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6.29선언에 의해 직선제로 개헌이 되면서 백악관과 국무부 앞에서 벌인 최후의 시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