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잡지』

원어 항목명 The Korean Pacific Magazine
한자 太平洋雜誌
영문 The Korean Pacific Magazine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문헌/연속 간행물
지역 미국 하와이주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창간 시기/일시 1913년 9월 1일
속간 시기/일시 1930년 12월 13일
원어 항목명 The Korean Pacific Magazine
성격 국문 잡지
관련 인물 김영우|정태화|송필만|윤치영|김현구|김원용
창간인 이승만
정의

1913년 9월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이승만이 창간한 월간 국문 잡지.

개설

『태평양잡지[The Korean Pacific Magazine]』는 1913년 9월 1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이승만(李承晩)이 국문으로 발간한 종합 잡지이다. 1920년 7월 이승만대한인동지회를 결성한 이후로는 대한인동지회의 기관지 역할을 하였다. 월간으로 발간되던 『태평양잡지』는 1930년 12월 13일부터 『태평양주보[The Pacific Weekly]』로 제호를 바꾸고 주간지로 발간되기 시작하였다.

창간 경위

이승만은 1912년 3월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Minneapolis)에서 개최된 세계감리교선교대회 참석을 위해 왔다가 다음 해 2월 하와이로 향했다. 1913년 1월 28일 오후에 시에라(Sierra)호 편으로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2월 3일 월요일 아침 8시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이승만한인기숙학교 교장으로 활동함과 동시에 1913년 9월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태평양잡지』를 창간하고 주필을 맡아 한인 사회의 지도적 인물로 부상하였다.

구성/내용

1910년대 기사의 대부분은 이승만의 저술이고, 1920년대에는 주필이 주로 기사를 집필하였다. 1920년 7월 이승만대한인동지회를 결성한 이후 『태평양잡지』대한인동지회의 기관지 역할을 하였다. 『태평양잡지』는 기본적으로 자주 독립과 민중 계몽을 목적으로 하며 다양한 분야의 주제를 담았다.

변천과 현황

1910년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서는 재정과 교육 기관 지원 문제로 분쟁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태평양잡지』이승만의 노선을 옹호하는 글들을 수록하여 여론을 주도하였다. 창간 초기에는 이승만이 사장과 주필을 겸하며 원고 작성과 편집을 혼자 맡아 하고, 안현경(安顯景)이 재무와 영업을 도왔다. 1920년대 전반에는 주필·발행인 겸 편집인·재무·인쇄 등의 구분이 있었는데, 주필은 김영우(金永佑)[국문]·정태화(鄭太化)[영문]·송필만(宋必滿)·윤치영(尹致暎)이 맡았다. 1930년대에는 이승만이 사장을 맡고 김현구(金炫九)김원용이 편집을 맡았다. 1920년 7월 이승만대한인동지회를 결성한 이후 『태평양잡지』대한인동지회의 기관지 역할을 하였다. 『태평양잡지』의 한 회 구독료는 25센트였고, 1년 구독료는 2달러 50센트였다. 『태평양잡지』는 1924년 당시 매 호 700부씩 인쇄되어 하와이, 미국 본토, 멕시코와 쿠바, 중국, 영국과 독일 등지로 배포되었다. 월간으로 발간되던 『태평양잡지』는 1930년 12월 13일부터 『태평양주보』로 이름을 바꾸고 주간으로 발간되기 시작하였다.

참고문헌
  • 김원용, 『재미 한인 오십년사』(캘리포니아 리들리, 1959)
  • 『재외동포사 총서』3-태평양잡지·태평양주보 색인(국사편찬위원회, 2005)
  • 『해외의 한국 독립운동 사료』37-미주편 10(국가보훈처, 2013)
  • 오영섭, 「하와이에서 이승만의 『태평양잡지』 발간 활동과 독립사상」(『이승만과 하와이 한인사회』,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2)
  • 오영섭, 「1910~1920년대 『태평양잡지』에 나타난 이승만의 정치사상」(『한국민족운동사연구』70,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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