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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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미국 |
시대 | 현대/현대 |
발급 시기/일시 | 1948년 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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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보고서 |
관련 인물 | 김호 |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하부 조직인 하와이 의사부와 북미 집행부에서 14명을 선발하여 한국 파견 대표단을 구성하였다. 미국과 소련이 대립하고 남북이 분단되고 좌우 이념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미 군정 시기에 국내의 정치·사회·경제 안정을 도모하고 행정 자치를 도우려는 목적이었다. 제1진[6명]은 1945년 11월 4일, 제2진[8명]은 1946년 2월 21일에 입국하여 어느 정파나 단체에 치우치지 않은 3자 입장에서 국내 정세를 객관적으로 관찰, 조사하면서 국내 사정에 어두운 미 군정청에 협조하였다. 위원회 대표 단원들은 좌우 합작을 통해 분단을 막고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신진회가 결성되는 과정에서 단원 대부분은 1946년 11월까지 미국으로 돌아갔다.
잔류한 김호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관선 의원 및 적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적산 처리 및 민족반역자특별법 제정에 진력하는 한편, 김원용 등과 함께 민족자주연맹을 중심으로 좌우 합작을 통한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을 끝까지 전개하였다. 그러나 남한단정론이 현실화된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의 방한을 끝으로 결국 김호와 김원용은 1948년 1월 25일 미국으로 건너갔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국내 파견 대표단 활동을 마감하고 미국으로 돌아온 김호는 위원회에 남은 3,500달러로 2년 2개월간 경험한 국내 사정을 담은 『해방조션』을 1948년 12월 발간하였다.
『해방조션』의 세부 목차는 다음과 같다.
머리말
정국의 혼란- 해방의 날, 건국준비위원회 선언, 인민공화국 선언, 대립의 혼란, 조선의 진주군, 군정 시설, 군정의 고문(顧問), 사법의 경찰, 미 군정의 정책, 이승만 박사의 환국, 친일파 결합, 임시 정부의 입국,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 반탁과 찬탁 운동, 극우익의 연맹체, 극좌익의 연맹체,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 정당의 성격, 극좌익, 극우익, 중간 세력
남조선 과도 정부-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 과도 정부 인원수, 관리의 부패와 혼란, 민중 단체의 혼란, 공산당 위조지폐 사건, 이승만 박사의 정당 분립, 지도자들의 불합작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 공동 성명서 제1호부터 제7호까지, 공동 위원회 재기 교섭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 공동 성명서 제9호에서 제11호까지, 공동 결의서 제5호에서 6호, 답신안, 남조선 정당급 사회단체, 북조선 정당급 사회단체, 미국 대표의 성명서, 소련 대표의 성명서
조선 문제 국제연합에 제출- 각 정당의 동향, 극우파의 동향, 극좌파의 동향, 중앙 노선의 동향, 국제연합 총회와 조선 문제, 유엔조선임시위원회단 회의, 남조선 인민에게 포고함, 남조선 선거 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