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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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캐나다 미국 |
시대 | 현대/현대 |
캐나다 한인 이민자들이 선교 활동, 직업, 사업, 교육을 위해 다시 미국으로 이주한 현상.
초기 캐나다 한인 이민자들은 초기[1905~1960년]에는 더 많은 한인이 거주하는 미국으로 선교 활동이나 박사 학위 취득, 그리고 더 나은 일자리와 신분 상승에 대한 기대로 미국으로 재이주하거나 재이민하였다. 그리고 1960년대 이후에 재캐나다 한인 이민자들은 캐나다의 인종 차별적 이민 정책과 이민자의 경력이나 자격의 평가 절하, 미국의 기술자나 과학자의 유입 정책과 의료 보건 요원의 충원, 더 나은 직업이나 사업,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이주하거나 이민을 하였다.
캐나다는 1960년대까지 순수한 백인 정착민의 이민만을 고수하는 인종 차별적인 이민 정책을 펴 왔다. 초기의 영국이나 프랑스 계통의 이민자만을 받아들였던 캐나다는 1896년이후 곡물과 천연자원을 운반할 대륙 횡단 철도에 필요한 인력을 충당하기 위해 배타적인 이민 정책을 완화해 동부 및 남유럽인에게 이민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러나 인종 차별 정책은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어 동유럽과 남유럽인과 아시아인들에 대하여 차별을 자행했고 이민 선발 역시 매우 제한적이고 선별적인 이민 정책을 고수하여 1961년 인구의 97%가 유럽계 백인이었고 유색인은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 50,000명의 중국인과 일본인, 토론토나 몬트리올에 약 70여 명의 한국인이 있었다.
캐나다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신학을 공부하고 선교 활동을 위해 캐나다로 온 유학생들이었는데, 캐나다에서 공부를 하고 선교와 학사 학위와 박사 학위 취득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1888년 12월 서울에 온 캐나다 선교사인 제임스 게일(James Gale)과 로버트 하크니스(Robert Harknis)의 주선으로 1905년 신학 공부를 하고 선교 활동을 하고자 캐나다 밴쿠버항에 온 최초의 학생은 김일환이었다. 김일환은 캐나다 공무원들이 ‘조선’이라는 국가를 몰라 3일동안 구류당하였다. 선교와 영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입국했지만 이후 선교 활동과 학위 취득을 위해 김일환은 미국으로 떠났다. 김일환 다음으로 캐나다에 도착한 정인표는 캐나다에서 초등학교 7학년에 입학하고 2년 후 졸업하였고 이후 5년간 머물다가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대학 학위를 받고 시카고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1915년 캐나다에 이주해 온 조희렴, 1919년 김용흘은 노바스코샤주 댈하우지대학[Dalhousie University]에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대학, 하버드대학, 뉴욕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농업 국가에서 산업 국가로 도약하면서 캐나다는 1967년 인종 차별 정책을 철폐하고 이민 점수제를 도입하면서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를 표방하며 모든 이민자에게 문호를 개방하였다. 1962년 캐나다 정부의 이민자 자격 선발에서 국적이 폐기되었고, 1963년 한국과 캐나다의 국교 수립이 있은 이후, 1967년 이후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 500여 명이 캐나다에 들어오고 생계형 한인 이민자들이 이민와서 1974년부터 1976년까지 9,499명으로 급증하였다. 이 중에는 덴마크의 농업 연수생, 베트남에 파견되었던 기술자, 남미의 농업 이민자들도 캐나다로 재이주하였다. 또한 1980년부터 1982년까지는 300여명의 여성 봉재사들이 매니토바 패션회사의 초청으로 집단으로 이민을 와서 거의 매년 1,000여명의 한인 이민자가 캐나다로 이주했다. 이후 1986년부터 사업 이민을 강화하고 1987년부터 순수 투자 이민을 확대하여 거의 2,000여 명으로 늘어나면서 1980년대 중반까지 주로 가족 이민 중심이었던 한인 이민이 1987년부터 사업 이민으로 바뀌었다. 1988년 총 한인 이민자 2,664명중 1,355명이 사업 이민자였다. 1980년부터 1991년까지 캐나다의 한인 이민자 수는 20,000여 명으로 대부분 토론토와 밴쿠버 등에 정착하였다.
1998년 한국의 IMF 이후 일자리를 찾아 중산층이나 전문가들이 직업적 기회와 사업을 위하여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하지만 한인들은 캐나다가 모국에서 취득한 자격증을 인정하지 않거나 평가 절하하여 전문직의 자격이나 임금에서 차별을 겪고 대부분 한국보다 더 낮은 직종의 일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러자 보건 인력에 충당할 의사와 간호사를 받아들이고 IT 전문가와 과학자들의 이민을 수용하는 미국으로 다시 이민을 떠나는 이들이 생겼다.
캐나다 이민성의 보고에 의하면 1995~2000년 캐나다 입국자들은 40,000명인데 미국으로의 두뇌 유출은 매년 10,000명으로 추산되며, 1990~2000년 재캐나다 한인 이민자 3,965명 중 14.1%가 미국으로 재이민하였다. 이외에도 더 나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그리고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여 한인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는 미국으로 이주해서 언어적 장벽을 극복하고 사회적 안정을 꾀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기도 하였다.
생계형으로 캐나다에 이주해 온 한인들은 대부분은 공장이나 농업, 광산, 도로 건설에 종사했다. 사업 이민자들은 캐나다에서 면허가 인정되지 않고 경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평가 절하되어서 더 차별적인 임금을 받거나 무시를 당해 고용이나 승진에도 많은 차별을 당하자 자영업으로 진출하거나, 이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미국으로 재이민을 떠났다.
특히 의사 등 의료 전문직과 IT에 종사하는 전문직 한인들은 196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하게 성장한 미국의 의료 보건 분야에 필요한 보건인력을 충당하기 위해 이민 문호를 개방하고, 소련에게 유인 우주선 개발의 주도권을 빼앗긴 과학 기술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받아들이는 미국으로 재이민을 떠났다. 1990년대 재캐나다 한인이 미국으로 재이민을 간 숫자는 3,965명인데 이 중 의사나 의료 분야 한인의 수가 11.7%인 463명이며, IT 전문가는 65명 중 14.1%가 미국으로 재이주하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투자 이민과 기업 이민을 온 재캐나다 한인들 역시 이전의 이민자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훨씬 부유하고 교육 수준도 높았다. 그런데 10만 달러의 자금을 투자해 밴쿠버시와 같은 도시에서 부부가 함께 자영업을 해서 한달 순이익 3,000~4,000달러 정도의 수입만을 얻어 최저 임금에도 못미치는 수익을 얻게 되자 점차 한인들의 수가 많고 코리아 타운 등에서 언어적 장벽을 극복할 수 있는 미국으로 재이민을 하는 경향이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