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미국 |
시대 | 현대/현대 |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한 재미 한인들의 이민 동기.
한국에서 미국으로의 이민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자녀의 사회 경제적 신분 상승이었다. 이 외에도 미국의 대중문화를 선망하여 이민을 선택한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의 이민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계층은 산업화 과정에서 가장 혜택을 본 신중간 계급이다. 신중간 계급이 이민을 결심하고 실행한 주요 동기는 한국에서는 본인은 물론 자녀의 사회 경제적 신분 상승의 기회가 제한된다는 인식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 기간 동안 피난온 월남인의 경우 이주민 신분이었기 때문에 남한 내 사회적 지위가 불안하였다. 그 결과 1962년 정부가 해외 이민을 장려하자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미국으로의 이민을 선택하였다.
자녀의 교육 문제로 이민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의 경우 1969년 이후 중학교 무상 교육이 실시되었지만 여전히 학부모의 교육비 부담은 컸고 대학 등록금의 경우 가계 소득의 증가분보다 빠르게 인상되었다. 신중간 계급의 경우 대학 교육을 통해 신분 상승을 이룩했으므로 자녀의 대학 교육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국의 과중한 교육비 부담 및 입시 문제는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교육의 기회가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교육과 경제적인 이유만 이민의 동기는 아니었다. 한국 전쟁 이후 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전파된 미국의 대중문화 전파로 생활 수준과 삶의 질 향상에 대한 열망은 증가했다. 당시 한국의 경제적 여건은 이 열망을 채우기 어려웠다. 신중간 계급의 경우 이민을 통해 이 열망을 충족하고자 했다. 또한 신중간 계급은 노동자 계층에 비해 재산, 인적 자본, 정보, 사회적 연결망 등 자원을 동원하기에 유리했기 때문에 미국으로 이민을 많이 가게 되었다.
재미 한인 가운데 첫 번째 이민 동기에 해당되는 사례로 인드루 정이 있다. 1974년 약사가 되기 위해 도미하여 약사 장교 및 정보 장교 등 미군에서 31년간 군복무를 했으며, 전역 후 LA에서 투자 컨설팅 업체를 운영하며 미군재향군인회 이사장을 맡은 등 활발한 사회 활동과 저술 활동을 했던 경력이 있다.
두 번째 이민 동기에 해당되는 사례로 장태한 교수[UC 리버사이드 소수 인종학과]가 있다. 1974년 가족 이민으로 로스앤젤레스에 이민 와 시민권 취득과 대학 학자금 혜택이 있는 미육군에 입대하여 제대 후 UCLA에서 소수 인종학 제1호 한인 박사이자 현재는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소장을 맡아 미주 한인 사회의 역사를 알리고, 한인 사회의 정체성을 위해 연구 및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끝으로 세 번째 이민 동기의 사례로 송정훈, 김종근, 박지형이 있다. 유학생 신분으로 도미한 세 명이 2013년 ‘푸드트럭 컵밥’을 만들어 유타 주에 컵밥 붐을 일으켜 지역 신문과 잡지에 대서 특필되었다. 창업 2년 만에 유타주 전역을 누비는 푸드트럭 4대를 비롯하여 축구장, 농구장, 미식 축구장 등 운동 경기장 자체 부스 9개, 레스토랑 2곳 등으로 짧은 시간에 눈부신 성장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