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무역회사

한자 韓美貿易會社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10년
해체 시기/일시 1912년
성격 무역회사
정의

191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설립된 재미 한인 사회 최초의 무역 회사.

개설

1910년 2월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설립되어 1912년까지 존속했던 한미 합작 무역 회사로,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 회원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근대적 형태의 회사였다. 사장은 미국인 찰스 피셔(Charles Fisher)가 맡고, 총무 최영만(崔永萬), 사무원 조성학(趙成學) 등으로 운영되었다. 당시 한국 통감부(韓國統監府)의 제재를 피하기 위해 합자 회사(合資會社) 형태로 조직되었으며, 독립운동에 필요한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설립 목적

한미무역회사는 사장을 미국인이 맡음으로써 한인 회사에 대한 한국 통감부의 감시와 통제를 피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한미무역회사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을 통해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변천

한국인이 공식적으로 미주 지역으로 이민한 것은 1902년 이후의 일이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1882년 미국과 한미수호통상조약 등을 체결하면서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이민이 가능하게 되었다. 주한 공사 호러스 알렌(Horace Allen)의 제안으로 100여 명의 한인이 계약 노동자로 하와이에 간 것이 한국인 최초의 미주 이민이었다.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주로 노동자로 일하였으며, 극히 소수의 이민자들만이 소규모 자영업에 종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0년 대동보국회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근대적 형태의 회사가 한미무역회사이다.

사장은 미국인이, 총무와 사무원 등은 한인이 맡음으로써 한미 합작 형식을 취하였으나, 이는 한국 통감부의 압력을 회피하려는 방책이었다. 미국산 물품을 한국으로 수입하고, 한국산 물품을 미국으로 수출하여 재미 한인과 한국인 모두에게 이익을 주려는 계획으로 회사를 설립하였으나,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이러한 계획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910년 7월 12일 총무 최영만이 한국 화물 수입을 위해 귀국하였다가 국권 피탈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놓쳤을 뿐만 아니라 자본금 확충에도 어려움이 있어, 1911년 회사는 청산 절차에 들어갔다. 이런 과정 속에서 한미무역회사는 미국의 허가도 받지 못한 채 1912년 문을 닫게 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10년 6월 서기풍(徐基豊)을 중심으로 평양지사가 설치되어 사업을 확대하고자 하였고, 1910년 7월 “미국 상품을 국내로 수입해 우리 동포의 제품 생산을 발전시키며, 국내 제품은 외국에 수출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최영만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 29일 국권 피탈과 1911년 1월 1일 공포한 ‘조선회사령’은 국내 토산물의 수출을 어렵게 만들었고 국내 여러 대리점의 존립까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대미 수출에 차질이 생기자 본사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에 큰 점포를 세우려던 계획이 무산되었고 정상적인 영업이 어렵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한미무역회사는 존속 기간은 짧았으나, 일본 정부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 해외 민족 자본을 지켜내고 독립운동을 지원할 기반을 마련하려는 노력 속에 등장한 합자 회사였다.

참고문헌
  • 김원용, 『재미 한인 50년사』(혜안, 2004)
  • 전우용, 『한국 회사의 탄생』(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1)
  • 「[미대륙 한인 백서] 샌프란시스코, 해외 독립운동 산실」(『LA 중앙일보』, 2003.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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