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동실업주식회사

한자 泰東實業株式會社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미국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10년 3월 1일
성격 주식회사
설립자 대한인국민회
정의

1910년 3월 1일 북미 대한인국민회가 독립 전쟁 기지를 조성할 목적으로 설립한 개발 회사.

개설

1908년 이후 의병 전쟁이 쇠퇴하자, 공립협회는 1907년부터 시도한 통일 연합 기관을 확대·설치하여 정치·군사·경제 등 다방면에 걸쳐 실력을 양성한 후 미일 전쟁 등 독립 전쟁의 최적기를 포착하여 독립 전쟁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독립 전쟁을 준비하면서 미국이라는 원거리성이 독립 전쟁 개전에 장애가 될 것을 우려하여, 1907년부터 원동 지역에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1908년 9월 공립협회 수청지방회가 설립되자, 공립협회는 1908년 10월에 아세아실업주식회사(亞細亞實業株式會社)를 발기했다. 아세아실업주식회사는 임시 규칙에서 ‘내지 혹 외국에 적당한 곳’을 물색하여 식산흥업을 일으키려 하였으며, 그 본부는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에 설치하고자 하였다. 공립협회의 아세아실업주식회사 설립 소식이 전해지자, 1909년 1월 공립협회 수청지방회도 김기옥·오하영 등이 발기하여 공립상업회사를 설립하고 공립협회 총회에 부속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즈음 공립협회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통합하여 1909년 2월 국민회를 창립하자, 독립군 기지 개척 사업은 국민회 사업으로 이관되었다. 국민회는 아세아실업주식회사를 태동실업주식회사(泰東實業株式會社)로 개칭하여 지속적으로 사업을 추진하였다. 즉, 태동실업주식회사는 1910년 3월 1일 북미 대한인국민회가 독립 전쟁 기지를 조성할 목적으로 만든 개발 회사이며, 그 목적은 원동에 독립군 근거지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자본금 총액을 50,000달러로 정하고 매주 50달러씩 1,000주 모집을 시작하였다. 미주에서 파견된 정재관·김성무 등으로 하여금 봉밀산(蜂蜜山) 지역에 미간지 2,430에이커를 매득하고 개간하게 하였다. 사실 태동실업회사는 국민회가 원동 지역 한인들을 독립군의 기반으로 삼고자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에 있던 한인 200호를 이민하려던 계획으로 추진된 것이었다. 그러나 현지의 중국 관리가 태동실업주식회사가 매입한 땅이 국유지라 개발할 권리가 없다고 하고, 또한 이 지역에 마적의 행패가 심하여 안정성이 없던 까닭에 사업이 실패하고 경비만 3,000달러를 소모하였다.

설립 목적

공립협회를 이어 받은 대한인국민회는 독립 전쟁 준비를 위해 원동 지역[만주, 연해주 등]에 독립 전쟁 기지를 조성할 목적으로 태동실업주식회사라는 개발 회사를 만들었다.

변천

1909년 2월 공립협회하와이 한인합성협회가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가 설립되었다. 대한인국민회는 기존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고 재러 한인들의 실업 진흥을 목적으로 1907년 10월 21일 설립된 아세아실업주식회사를 태동실업주식회사로 개칭하고, 중국에 독립근거지 구축 사업을 추진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태동실업주식회사는 1908년 2월부터 자본금 총액을 5만 달러, 매주 50달러씩 1,000주 모집을 목표로 주식 모집 광고를 내어 12월 초까지 16,000여 달러를 모집하고, 정재관·이상설·김성무를 국민회 블라디보스토크 임시 사무원으로 선출하여 원동 지역으로 파견하였다. 김성무는 북만주 봉밀산 일대의 중국인 토지를 매득하고 이 일대의 토지를 개척하여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고자 하였다. 봉밀산 지역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지역으로서 항카호[興凱湖] 근처에 있어 물산이 집중되고 수자원이 풍부한 곳으로, 봉밀산 일대를 한인 이주촌으로 개척하고자 했다. 김성무는 1910년 1월 태동실업주식회사 자금 총 3,500루블을 송금받고 개척 사업에 착수하였다.

태동실업주식회사는 1910년 5월부터 샌프란시스코에 상설 위원회를 설립해 임원을 선정하고 고본표(股本票)를 제조하여 각 주주에게 발급하는 등 활발한 모금 활동을 전개해 1910년 5월까지 2,095달러를 모집해 투자하였다. 투자금으로 가옥 건설과 도로 설비와 농업 경영에 필요한 농기구 등을 마련하였다. 1911년 7월경, 토지 등기를 마치고 18칸의 사무실 건물과 35호의 민가가 들어서 만주, 러시아 지역의 한인들을 이주시켰다

의의와 평가

봉밀산의 개척 사업은 국민회의 정식 투자 사업으로 진행되었지만 자금 부족과 흉년, 그리고 이주 한인들이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 등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해 투자된 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고 지속적인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 밀산(密山) 일대는 만주와 러시아를 이어주는 한인들의 중요한 삶의 터전이 되었다. 1916년 홍범도는 빈민 300여 호를 이끌고 이곳에 들어와 한흥동에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참고문헌
  • 이명화,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과 통일 노선』(경인문화사, 2002)
  • 김원용, 『재미 한인 50년사』(혜안, 2004)
  • 강영심 외, 『1910년대 국외 항일 운동』II(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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