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Kim Brothers Compan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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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兄弟商會 |
영문 | Kim Brothers Company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들리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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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항목명 | Kim Brothers Company |
성격 | 기업체 |
설립자 | 김형순|김호 |
김형제상회는 1903년 미국으로 이주한 김형순(Harry Kim)[1886~1977]과 1914년 미국으로 이주한 김호(Charles Kim)[1884~1968]가 1920년 설립한 회사이다. 김형순은 1886년 경상남도 통영군에서 태어나 배재학당을 졸업하였다. 1903년 첫 이민선의 통역으로 하와이에 입국하였으며, 1906년 로스앤젤레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가 1913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였다. 김호는 1884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인 한성중학교를 1회로 졸업하였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거쳐 안창호가 세운 평양의 대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으나, 대성학교가 일제에 의해 폐교되자 1912년 11월 상해로 이주하였다. 이후 1914년 유학생 자격으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다.
김형순과 부인 한덕세는 1916년부터 프레즈노 교외 지역인 리들리(Reedley)에서 과일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화학당을 다녔던 한덕세는 자신의 선생인 김호가 미국으로 건너오자 김호를 리들리로 초빙하여 1921년 김형제상회[Kim Brothers Company]를 설립하였다. 김형제상회를 설립할 때 지분은 김형순이 50%, 부인 한덕세가 25%, 김호가 25%를 소유하고 있었다.
김형제상회는 한인 이민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예컨대 하와이 노동 이민 계약 기간이 끝난 2,000여 명의 한국인이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였으며, 그중 500여 명이 리들리 지역에서 일자리를 구하였으며 300여 명이 김형제상회에서 일하였다. 김형제상회를 중심으로 재미 한인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재미 한인 커뮤니티가 형성되었고, 김형순과 김호는 한인 공동체를 위하여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김형순의 재정 지원으로 1938년 재미 한인들을 위한 교회가 신축되었고, 고려학교를 세워 한인 2세들의 한국어 교육을 시작하였다. 김호도 농민 숙소를 지어 가족이 없는 재미 한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였으며, 묘지터를 구입하여 재미 한인들을 위한 장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항일 운동에도 깊숙이 관여하였다. 1936년 김호는 이승만이 동지회를 만드는 바람에 활동을 중지한 대한인국민회를 복원하였으며, 1937년 전 미주를 대표하는 본부를 로스앤젤레스에 두고 국민회관 건물을 두 사람과 한인들의 성금으로 신축하였다. 김호가 3회에 걸쳐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고, 1950년 김형순이 위원장으로 피선되었다. 1941년 김호는 한인 정치 단체를 포용하는 한족연합위원회 로스앤젤레스 집행위원장이 되었으며, 해방과 더불어 1945년 10월 한족연합연합회 14인 대표와 함께 귀국하였다. 하지만 김호는 여운형, 김규식의 중도 노선을 지지하며 남북 개별 정부를 반대하여 이승만과는 다른 입장에 서게 되었다. 1948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후 북미 대한인국민회 중앙 집행 위원장을 맡았으며 리들리로 돌아와 김형순과 함께 농사일에 충실하였다. 김형제상회는 지속적으로 한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여름이면 미국 전역에서 수백 명의 한인 유학생들이 김형제상회에서 일을 하고 학비를 벌 수 있었다.
김호는 1962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한인센터[현 한인회관]를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김형순은 부이사장으로 활동하였다. 김형제상회는 1958년부터 1964년까지 리들리의 부동산 57,530달러와 수입금, 다른 회원들의 기부금 4,035달러로 83명에게 장학금 38,938달러와 11명에게 대여 장학금 6,560달러를 지급하였다.
김호는 독립 자금 모금책, 국민회 총회장, 맹호군 설립자, 과도정부 입법위원, 로스앤젤레스 한인회관 설립자 등으로 활동하였고, 1968년 1월 5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호에게 1997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2002년 3월 김호의 묘를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김형순은 1977년 92세로 사망하여 국민회장으로 장례를 지냈으며, 대한민국 건국 훈장과 국민 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