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원어 항목명 Horace Newton Allen
영문 Horace Newton Alle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미국  대한민국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8년 4월 23일
수학 시기/일시 1881년
수학 시기/일시 1883년
활동 시기/일시 1904년
몰년 시기/일시 1932년 12월 11일
출생지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시
거주|이주지 조선
활동지 조선
원어 항목명 Horace Newton Allen
성격 외교관
성별
대표 경력 주한 미국 전권공사
정의

개항기 대한제국에서 주한 미국 공사로 활동하며 최초의 미국 하와이 이민을 주도한 선교사이자 외교관.

개설

앨런[1858~1932]은 미국 북장로교회 측 의료 선교사로 조선으로 들어와서 민영익을 치료한 것을 계기로 고종 황제의 주치의가 되었다. 이후 선교사들과 마찰로 인해서 선교사로서 활동하기보다는 주미 공사 외교관으로 임명되어 20년 조선 생활 가운데 16년을 외교관으로서 일하였다. 재미 한인들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에 있어서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활동 사항

앨런[Horace Newton Allen, 호레이스 뉴튼 앨런]은 1858년 4월 23일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시에서 태어났다. 1881년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 신학부를 거쳐 1883년 마이애미의과대학을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다. 1883년 동급생이었던 메신저[Frances Ann Messenger]와 결혼한 앨런은 미국 북장로교회 측 의료 선교사로 10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도착하였고, 4일 후인 10월 15일 난징에서 의료업을 개업하기도 하였으나 1884년 1월 상하이로 돌아왔다. 1884년 7월 10일 아내가 출산을 하자 앨런은 홀로 부산을 거쳐 1884년 9월 29일 인천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조선에 들어온 앨런안연(安連)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앨런이 조선에 들어온 지 3개월 만에 갑신정변이 발생하였다. 앨런은 당시 부상당하였던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왕실 의사[侍醫] 겸 고종 황제의 정치 고문에 임명되었다. 1885년 앨런은 광혜원(廣惠院)의 의사 겸 교수로 재직하였고, 1887년 참찬관(參贊官)에 임명되어 주미 전권 공사 박정양(朴定陽)의 고문으로 다시 미국으로 갔다. 2년 후인 1889년 다시 선교사로 조선에 파견되었으며 부산을 거쳐 제물포에 정착하였다.

앨런은 미국에게 유리한 각종 이권 사업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도 하였다. 앨런은 J. 모스에게 1895년 운산 광산의 채굴권, 1896년 경인철도(京仁鐵道) 부설권을 주선하였으며, 1897년 주한 미국 공사 겸 서울 주재 총영사가 되어 전등·전차선로 부설 등을 위한 권리가 미국에 부여되도록 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1900년 영국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를 결성하였으며, 1901년 주한 미국 전권 공사가 되었다.

특히 한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이민갈 수 있게끔 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당시 하와이의 정세는 이미 중국인과 일본인 노동자들이 이주해 있었다. 하지만 1882년 재정된 중국인 배척법으로 인해 중국인 노동자의 유입이 불가능해진 데다가, 일본인 사탕수수 노동자의 경우에는 임금 임상을 빌미로 걸핏하면 파업을 일으키는 터라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주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와이에서 이른바 빅 파이브(Big Five)라 불리는 다섯 개의 사탕수수 농장 대표 회사들이 눈길을 돌린 곳이 바로 조선이었다.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조선의 노동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일환으로 조선의 정세에 능통한 사람을 물색하던 중 당시 외교관으로 활동하던 앨런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1902년 앨런이 고향에서 휴가를 보내고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을 무렵, 사탕수수 농장주의 대표로서 어윈[William G. Irwin]이 앨런은 찾아갔다.

앨런은 조선으로 돌아가자마자 즉시 고종 황제에게 건의해서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 사업권을 따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민 사업권을 사업가 데쉴러[David Deshler]에게 주었다. 데쉴러는 앨런이 1897년 미국 공사로 임명될 수 있게 해 준 미국 오하이오 주지사이자 절친인 내쉬[George Nash]의 양아들이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들이 한국인 이민 노동자들을 요청하였을 때 앨런은 내쉬의 은혜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사업권을 고종 황제로부터 따 내어 데쉴러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활동해 온 앨런은 1904년 고종으로부터 훈일등(勳一等) 및 태극대수장(太極大綏章)을 받고 1905년 3월 조선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앨런은 20년간 조선에 있으면서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수행한 것은 불과 4년이었고, 16년은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조선의 각종 이권 사업에 개입하여 미국에 유리하도록 활동하였다. 앨런은 1932년 12월 11일 미국에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앨런의 저서로는 『Korean Tales』, 『Things Korean』, 『The Awakening of Korea』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앨런은 1904년 고종으로부터 훈일등 및 태극대수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 민경배, 『알렌의 선교와 근대 한미 외교』(연세대학교 출판부, 1989)
  • 『북미주 한인의 역사』(국사편찬위원회, 2007)
  • 『기록으로 보는 재외 한인의 역사』(국가기록원, 2016)
  • 「알렌은 순수한 목적의 의료 선교사가 아니었다」(『오마이뉴스』, 2009. 9. 15)
  • Arnold, D. A, 『American Economic Enterprises in Korea, 1895~1939』(Anro Press, A New York Times Company,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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