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Hee-byung Park |
---|---|
영문 | Hee-byung Park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출생 시기/일시 | 1871년 |
---|---|
수학 시기/일시 | 1896년~1897년 |
몰년 시기/일시 | 1907년 6월 9일 |
출생지 | 대한민국 강원도 철원군 |
거주|이주지 |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시 |
학교|수학지 | 미국 버지니아주 로어노크대학 |
활동지 |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시 |
묘소 |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시 반 버랜 블러바드 22495 |
원어 항목명 | Hee-byung Park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신성학교 설립자 |
개항기 말 미국 콜로라도주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박희병[1871~1907]은 1896년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 생활 후 평안북도 운산 금광에서 통역관 겸 영미관계 통상 교섭관으로 일하였다. 평안북도 선천 지방에 신성학교를 설립하여 애국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1906년 멕시코 유카탄 반도 어저귀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들의 참상을 밝히려 파견되었다가 미국에 정착하였다. 재미 한인 사회와 국권 회복을 위해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박희병은 1871년 강원도 철원군에서 태어났다. 서울 정동 감리교회를 다녔으며, 1894년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였다. 1904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게이오대학[慶應義塾]에서 2년 동안 수학하고 돌아왔다. 1896년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이강(李堈)[의친왕]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강은 미국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학이 있는 델라웨어시에서 2명의 수행원들과 2년 동안 머물렀고, 박희병은 버지니아주의 로어노크(Roanoke)대학에서 2년 동안 예과 수업을 받았다. 김규식, 서규병, 서광범 등이 로어노크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899년 정부의 소환령을 받고 귀국하여 외부 주사로 임명되어 공직에 종사하였다. 1903년 평안북도 운산 금광에서 통역관 겸 영미 관계 통상 교섭관으로 일하는 한편 평안북도 선천 지방에서 신성학교를 설립하고 조카인 박용만을 교사로 채용하여 애국 민족 교육에 매진하였다. 또한 운산 금광에서 애국 청년들을 모아서 광산 업무에 대한 기초 훈련을 시킨 뒤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시의 철도 건설과 광부로 노동 이민을 보내기도 하였다. 1904년 8월 보안회가 전개하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1906년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어저귀[henequen] 농장에서 한인들이 노예로 팔려가 짐승만도 못한 대접을 받는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서울 상동청년회에서는 박희병과 이범수를 진상 조사를 위해 멕시코로 파견하였다. 멕시코 파견 당시 이름을 박장현으로 개명하고 멕시코 한인의 실태를 보고하였으나 해결 방도를 찾지 못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박희병은 조카인 박용만과 함께 정한경·유일한·이희경·이정희·이종철·유은상과 이승만의 아들 이태선과 정순만의 아들 정양필 등 8명을 미국으로 오도록 주선하였다.
1906년 박용만과 덴버에서 합류하였고 여름부터 덴버 시내 유니언 철도역사 인근의 아라파호 거리에 건물을 인수해 한인 노동자들을 위한 여관과 직업소개소를 운영하고 한국에서 온 동포들을 돌보고, 일자리를 주선하였다. 또한 한인 유학생들을 규합하고 한인 경찰소를 구성하여 한인 사회의 질서를 지키고 조국의 국권 회복과 애국 운동의 거점으로 삼기도 하였다.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기간에 덴버 지역에서 북미 대한인애국동지대표회 개최를 준비하던 중 1907년 6월 9일 36세의 나이로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박희병의 묘소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 공동묘지[Riverside Cemetery]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