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 역사/근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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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미국 하와이주 |
시대 | 근대/개항기 |
몰년 시기/일시 | 1929년 9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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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이주지 |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시 |
활동지 |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시 |
성격 | 요리사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하와이 한인 식당 운영자 |
일제 강점기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한인 식당을 운영하였던 초기 이민자.
박덕순은 아내 박씨와 세 딸을 데리고 하와이에 이주한 후, 1남 4녀를 더 얻어 자녀는 모두 7녀 1남이다. 셋째 딸 노라 박은 수잔나 웨슬리 홈(Susannah Wesley Home)에서 12년간 기숙하며 공부하였고, 다른 자녀들도 같이 영어와 바느질과 가사일을 배웠다. 다섯째 딸 아네스는 간호사가 되었고, 넷째 딸 헤이즐은 감리교에서 영어로 설교한 첫 한인 목사 정의조와 결혼하였다. 노라 박은 한국인 최초로 미국 사범학교[Normal School]를 졸업하여 카우아이섬의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나 외국인[alien]은 관례상 미국 교사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사직하고, 다시 간호학을 전공하여 한국인 최초로 퀸즈(Queen's)병원 수간호사가 되었다.
박덕순은 1904년 아내와 세 딸을 데리고 미국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감리교 선교부에 의해 파견된 박덕순은 아내와 같이 하와이 한인 사탕수수 노동자에게 요리를 해 주기 위해 호놀룰루 인근 에와 농장에 처음으로 취사장을 열었다. 하와이에서 딸 넷과 아들 하나를 더 얻어 자녀는 모두 7녀 1남이었다. 『태평양주보』 1963년 8월 2일자에는 「진주만 원족회[소풍]와 지도자들의 연설」라는 제목으로 1913년 진주만에서 원족회[소풍]를 소개하고 있다. 기사에 의하면 이승만, 박용만 등의 이름과 함께 박덕순의 행사 진행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박덕순이 하와이 한인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열심히 살았음을 보여 주는 기사이다. 1918년 무렵 부인 박씨가 사망하였고, 박덕순 또한 1929년 9월 19일 수개월간의 투병 생활 끝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