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 역사/근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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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미국 캘리포니아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86년 5월 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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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01년 |
몰년 시기/일시 | 1977년 1월 25일 |
추모 시기/일시 | 2011년 |
출생지 | 대한민국 경상남도 통영시 |
학교|수학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활동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들리시 |
성격 | 농업가|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미국 농무성으로부터 표창을 받은 대표적인 한인 농업가이자 독립운동가.
김형순은 1886년 5월 4일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으며 1901년 배재학당을 졸업했다. 영어에 능통하여 1903년 첫 이민선의 통역 자격으로 도미하였다. 김호[1884~1977]와 1921년 중부 캘리포니아의 소도시 리들리에 김형제상회[Kim Brothers Co.]를 설립하고 과수와 묘목 사업 등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다. 김형순과 김호는 독립자금의 큰 제공자가 되었다. 특히 김형순은 1914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총 5,337원의 독립금을 지원하였다.
김형순은 1930년 이후 중가주(中加州) 한인공동회를 조직하여 광주 학생 운동 후원, 일본의 만주 침략 규탄, 재미 한교 연합 구성 등을 모색하다가 1936년부터 국민회 부흥 운동에 앞장섰다.
김호와 함께 김형제상회는 미국인 원예전문가 앤더슨(Anderson)에 의뢰하여 자두와 복숭아를 접종하여 넥타린[털없는 복숭아로 일명 Son of Peach]를 개발한 후 대규모로 재배하여 Le Granddhk와 Sun Gran이라는 상표로 미 전국에 보급하였다. 이후 1950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 한인센터(Korea Community Center)[현 한인회관 전신] 설립 시 부사장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형순의 공적을 기리어 2011년 대한민국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