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金裕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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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미국 하와이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8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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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09년 |
수학 시기/일시 | 1910년 |
수학 시기/일시 | 1915년 |
수학 시기/일시 | 1919년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활동 시기/일시 | 1953년 |
출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도 신천군 |
거주|이주지 | 미국 하와이주 |
학교|수학지 | 미국 네브래스카주 |
학교|수학지 |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시 에모리대학교 |
활동지 | 미국 하와이주 |
성격 | 의사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미국 하와이주에서 애국 청년 운동에 힘쓴 한인 의사.
아버지는 김영식 목사이고, 형은 김유순 목사이다. 김유택은 형 김유순의 유고를 기리기 위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김유순 장학금’을 설치하고 기금을 출연하였다.
1905년 18세 나이로 김유택은 아버지 김영식과 함께 이민 길에 올랐다. 감리교 목사인 형 김유순 목사[1882~1950]이 황해도 신천에서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어서, 김유택도 동일 지역 출신으로 추정된다. 1907년 미국 본토로 들어가 1909년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중학교에 입학했다. 1910년에는 23세 나이로 네브래스카의 하기군사학교[Summer Military Camp]인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13년 조지아주 에모리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15년 여름 에모리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19년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김유택은 하와이 초기 이민자로서 사회 활동 및 청년 운동에 적극 임하였다. 1927년에는 무궁화구락부를 창립하여 이승신[무궁화구락부 회장], 김찬제[무궁화구락부 부회장], 강영각[무궁화구락부 서기] 양유찬 등과 함께 활동하였고, 1928년 이원순, 김찬제, 양유찬, 민찬호 등과 함께 누아누 청년회[한인부 부이사장]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에는 하와이대학에 한국어와 한국 역사 등의 과목을 설치하기 위해 결성된 ‘한국 국어문화 및 역사위원회’ 발기인으로서 이승만, 양유찬 등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이어 1931년 9월 7일 “청년 운동으로 대대적으로 해 보기 위해 김유택 집에 모여 토론회”를 개최했다는 『신한민보』의 기사에서 호놀룰루의 김유택 집이 하와이 청년 운동의 중심 장소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날 토론회에서 이용직 목사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강영악은 서기, 김유택은 사교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1931년 9월 29일 누아누 청년회 사교실에서 ‘하와이 청년운동후원회’를 개최하고 200여 명의 동포들이 모인 가운데 김유택이 그 취지를 설명하였다.
1953년 9월 18일자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저』지에는 보건국이 김유택 박사를 나병 환자 주치의로 임명하였다는 보도가 게재되었다. “한국 출생의 미국 시민 김 박사는 1905년에 부모와 함께 이민 왔으며, 중학교부터 본토에서 공부하고, 1919년에 조지아 주 애틀랜타의 에모리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보스톤 시립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뉴욕 이티카 홱스톤 병원과 버팔로의 뉴욕 결핵병원에서 특별 훈련을 받았다. 그 후 하와이로 돌아와 지난 27년 동안 일반 진료를 보았다. 김 박사는 의학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나병에 관심을 가졌으며, 전 칼리히 나병환자 입원소를 자주 드나들었다. 김 박사는 일반 진료를 보면서 특히 피부병 환자를 많이 받았다.”라고 김 박사를 소개하고 있다.
김유택은 형 김유순 목사의 유고를 기리기 위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김유순장학금’을 설치하여 기금을 출연하였다. 김유택의 사망 시기는 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