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 역사/근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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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미국 하와이주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9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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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미상 |
출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도 |
거주|이주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
활동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여 |
대표 경력 | 대한부인애국단 서기 |
일제 강점기 사진 신부로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
김석은[1895~?]은 사진 신부로 미국으로 건너간 후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새크라멘토를 중심으로 국민회, 대한부인애국단에서 활동하고 항일 운동 자금을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김석은은 평안도 출신으로 1895년 태어났다. 12세 무렵부터 사립 기숙사에 머물며 동대문안 병원 간호학교에서 간호사 공부를 하였다. 일제에 의해 가산이 몰수되자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세상에서 공부를 하겠다는 꿈을 품고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19세 되던 1913년 김홍균의 사진 신부가 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김석은의 증언에 따르면 “교육을 위해 도미하였다. 일본이 교육을 통제하고 한인들은 일본어를 배우고 사용하고, 말하도록 강요당하였다. 자유가 없었고, 이것이 모국을 떠난 이유였고, 고국을 떠날 유일한 방법은 사진 신부였다.”라고 하였다. 김홍균을 실제로 만나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속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김석은은 할 수 없이 결혼하였고, 3남 2녀를 두었다. 1915년 고향 친구인 김도연에게 편지를 보내 새크라멘토 거주 한인 윤응호를 소개하며 미국으로 올 것을 권유하여 새크라멘토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김석은의 남편 김홍균은 1913년 결혼과 함께 세례를 받았으며, 1913년 가을 자신의 집에 서양인 교사를 고빙하여 학교를 열었고[한인 78명 수학], 김석은 또한 남편 김홍균과 함께 자택의 야간반에서 공부하였다. 성공한 한인 사업가인 남편 김홍균과 함께 김석은은 여자애국단 독립 의연금, 중국 항일 전쟁 동정금 등 수많은 기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18년 국민회에 가입하였고, 1919년 대한부인애국단의 서기로 활동하는 등 의욕을 보였다. 특히 1919년 대한부인애국단 명의로 미국 대통령에게 「일본의 야만스런 행위에 대해 고발하는 공개 청원서」를 제출한 것은 지역 내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샌프란시스코 새크라멘토에서 자본금 5,000원의 대규모 콩 농사 사업을 하며, 새크라멘토 한인 학생 기숙사를 설립하는 등 애국적인 지역 유지로 존경받던 남편 김홍균이 50세 되던 해인 1927년 심장 질환으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남편 김홍균의 사망 이후에도 김석은의 구호 활동은 지속되어 초기 미주 한인들의 활동상을 보도하는 『신한민보』에 58건이나 이름이 언급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김석은은 1919년 대한부인애국단 명의로 미국 대통령에게 「일본의 야만스런 행위에 대해 고발하는 공개 청원서」를 제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