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Ho Yong Hah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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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咸鎬墉 |
영문 | Ho Yong Hahm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하와이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68년 6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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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54년 3월 27일 |
추모 시기/일시 | 2005년 |
출생지 | 대한민국 경기도 광주 서면 고덕리 |
거주|이주지 | 미국 하와이주 |
활동지 | 미국 하와이주 |
원어 항목명 | Ho Yong Hahm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미국 하와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진사의 딸이던 최해나[1882-1979]와 1899년에 혼인하였다.
1905년 하와이 마우이섬의 커머셜앤 슈가 사탕수수농장 노동자 이민온 함호용은 하와이 가일누아 지방 한인합성협회 일원으로 조국의 국권회복과 재외동포의 안녕 보장, 후손들의 교육장려를 위해 노력했다. 1909년 2월 합성협회가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공립협회와 통합해서 대한인국민회로 조직되자, 대한인국민회 마우이지방회에 가입하였다. 함호용부부는 대한인국민회를 통해 수차례 애국공채를 매입했고,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는 대한독립운동비 제일차의연금과 대한민국 자유공채금 등을 냈다.
함호용은 마우이섬 스프렉클스빌 한인교회에서 1923년부터 지역 설교사로서 강단 설교를 하였다.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암 헨리 프라이(William Henry Fry)는 1943년 9월 3일, 감리교단 공문을 통해 추후 목사가 정해지기 전까지 함호용에게 스프렉클스빌 한인교회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사실이 확인된다.
UCLA 리서치도서관에 함호용이 보관했던 각종 문서들이 소장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함호용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