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Kilsoo K. Haan |
---|---|
한자 | 韓吉洙 |
영문 | Kilsoo K. Haa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하와이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900년 5월 31일 |
---|---|
몰년 시기/일시 | 1976년 7월 25일 |
출생지 | 대한민국 경기도 장단군 |
학교|수학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구세군훈련학교 |
활동지 | 미국 |
원어 항목명 | Kilsoo K. Haan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미국 하와이주에서 선전 및 외교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한길수는 1900년 5월 31일 경기도 장단에서 출생하였고 1905년 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건너왔다. 이승만이 교장으로 있던 한인중앙학원에서 수학하였고, 샌프란시스코의 구세군훈련학교서 훈련을 받고 구세군 대위로 하와이 각지에서 봉사하였다. 일본의 만주 침략 직후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이 선전 외교 활동을 위해 1931년 10월 25일 대한인홍보부를 조직할 때 구미 지역 담당 서기로 활동하며 미국 정부와 국제연맹을 상대로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미 육군 정보 당국과 미 해군 정보부를 도와 일제측 동향에 대한 정보 수집을 담당하였다. 1933년 3월 「하와이 일본인 여론 조사」를 작성해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이정근과 선전부장 정두옥의 명의로 미 육군 정보 당국에 제출하였다. 1933년 4월 20일 이용직과 함께 「한국인의 호소」라는 영문 보고서를 작성해 미 전쟁부 장관에게 보내 미일 전쟁이 불가피 하니 반일 성향이 강한 한인들을 이용해 줄 것을 요청했다.
1933년 7월 하와이를 방문한 김규식의 활동을 도운 것을 계기로 1935년 2월 15일자로 중국 상해로부터 중한민중동맹단 미주 대표로 인준받고 이때부터 스스로 중한민중동맹단의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 3월 27일 하와이 상원 의원에 서신을 보내 하와이 내 일본인의 위험성을 폭로하고 대책을 요청하였다.
1937년 10월 하와이의 미국 주 편입을 논의하기 위해 미연방 상하 양원 합동위원회 공청회가 호놀룰루에서 열릴 때 하와이 내 일본인의 음모론을 폭로하여 한인 사회는 물론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38년 9월 하와이를 떠나 미국 본토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선전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한길수의 활동을 후원하기 위해 1938년 12월 2일 호놀룰루에서 차신호를 단장으로 하는 중한민중동맹단의 조직이 처음으로 결성되었다.
한길수는 조선총독부의 여권을 갖고 유학 온 재미 유학생이 본국으로 강제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서 안정적으로 체류할 수 있도록 하였고, 한인을 일본인과 구분해 등록하게 하여 태평양 전쟁 때 일본인과 같은 ‘적성 외국인’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1939년부터 1942년 5월까지 미국 90개 도시를 순행하며 179회의 반일 강연 활동을 전개하고 이를 통해 미국 사회에 배일 운동을 격화시켰다. 1941년 4월 호놀룰루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결성될 때 국방 공작 봉사원의 직책을 받아 활동하였다.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 창설대회가 개최될 때 해외한족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해 선전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해방 후 1946년부터 1947년까지 국제연합의 비공식 위원회인 스피커스 리서치 커미티(Speakers Research Committee)의 부의장으로 활동했다. 한길수는 1976년 7월 25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