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崔昌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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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하와이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92년 9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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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77년 12월 19일 |
추모 시기/일시 | 2014년 |
출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당주동 |
거주|이주지 | 미국 하와이주 |
활동지 | 미국 하와이주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미국 하와이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최창덕(崔昌德)[1892~?]은 1913년 미국 하와이로 이주하여 하와이 대한인교민단, 한족통일독립당촉성회,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중한민중대동맹,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유한책임연합상업주식회사에서 활동하고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이다.
최창덕은 1892년 9월 25일 서울 당주동(唐珠洞) 84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최재진(崔在眞)이다. 1913년 하와이로 이주하였고, 1926~1929년 하와이 대한인교민단 총단장을 역임하였다. 1928년 한국민족통일촉성선언서를 대내외에 발표하고 한족통일독립당촉성회를 결성하고 서무부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33년 7월 김규식이 하와이를 방문하자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가입 및 후원을 요청하는 활동을 지원하였고, 1935년 2월 호놀룰루에서 중한민중대동맹(中韓民衆大同盟) 하와이지부를 창립하였다.
중한민중대동맹은 한중(韓中) 두 민족의 우의와 협력을 통한 항일전 수행을 목적으로 창립되어 외국인등록법 시행 시 일본인과 구별된 ‘한국인’으로의 등록 운동을 비롯해서 미국 정부 요로에 일본의 대미 침략설을 알려 미국의 대일 군사 활동과 임시정부에 대한 원조를 장려하는 외교 활동, 그리고 군수품의 대일 수출을 적극 방해하는 활동과 순회강연을 통한 선전 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또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적성국 재미 일인들의 적대적인 반미 활동 우려를 선전함으로써 미 정부로 하여금 일인 강제 수용 운동을 일으켜 이들 일본인의 활동을 제한시키기도 하였다. 한길수(韓吉洙)의 외교 독립 활동과 순회강연 활동을 후원하는 데 주력하였고 1938년 8월 동지회와 국민회의 합동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9년 2월에는 중한민중동맹단 서기,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국방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0년 호롤룰루와 와히아와에 거주하는 한인들과 합동하여 유한책임연합상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재무에 선임되었다. 하와이 와이하와에 거주하면서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해방 후인 1946년 미군정청의 임무를 띠고 고국으로 입국하였다. 1977년 12월 19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최창덕의 공적을 기리어 2014년 건국 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