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Cha Miris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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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車美里士 |
영문 | Cha Mirisa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캘리포니아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79년 10월 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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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01년~1905년 |
수학 시기/일시 | 1910년 8월 2일~1912년 7월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12월 9일 |
활동 시기/일시 | 1912년 8월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10월 |
활동 시기/일시 | 1950년 |
몰년 시기/일시 | 1955년 6월 1일 |
추모 시기/일시 | 2002년 |
출생지 | 대한민국 서울시 마포구 아현동 |
거주|이주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
학교|수학지 |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 |
활동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
묘소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
원어 항목명 | Cha Mirisa |
성격 | 독립운동가|교육가 |
성별 | 여 |
대표 경력 | 덕성여자대학교 이사장 |
일제 강점기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활동한 교육 운동가이자 독립 운동가.
차미리사(車美里士)[1879~1955]는 기독교 신앙을 토대로 미국과 국내에서 여성 교육 운동과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아버지 차유호와 어머니 장씨 사이에서 6남매의 막내로 출생하였고,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차미리사는 1878년 8월 21일 한성부 종로방 화동[현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본적지는 경기도 고양군 아현리이다. 미리사는 감리교회 세례명이다. 17세에 결혼하였으나 결혼한 지 2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였다. 이후 재혼하지 않고 개신교회인 감리교회의 신자가 되었고, 상동교회에서 미리사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930년대 후반까지 남편의 성을 따서 김미리사(金美理士)라는 이름으로 사회 활동을 하다가 1940년대부터 다시 아버지의 성씨인 차씨로 개명하였다.
1905년에 여 선교사의 알선으로 중국에 밀항하여, 선교사 헐버트의 소개로 소주(蘇州)에 있는 남감리교 신학교 중서여숙(中西女塾)에 입학하여 신학 전공을 하였다.
차미리사가 중국 유학을 마치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은 1905년 10월경이었다. 이후 약 5년간 교육 운동[대동교육회 활동], 사회 운동[이주 노동자 숙소 및 취업 알선, 한국 부인회 활동], 독립운동[대동보국회 활동], 언론 운동[『대동공보』 간행과 논설문 기고] 등을 활발하게 펼쳤다. 1905년 12월 9일 로스앤젤레스 근교 패서디나(Pasadena)의 호텔 그린(Hotel Green)에서 장경을 중심으로 차미리사, 김우제, 변창수, 이병호, 서원택, 강사겸 등이 발의하여 교육과 기독교 선교를 통한 구국을 목적으로 조직된 대동교육회(大同敎育會)를 창립하였다. 차미리사는 1907년 대동교육회를 개편, 확대한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 발기인이 되었고, 기관지 『대동공보(大同公報)』의 주간이 되어 『대동공보』를 편집, 발간하는 일을 하였다.
차미리사는 1910년 8월 2일 미국 중부 미주리(Missouri)주 캔자스(Kansas)에 있던 스캐리트(여자)성경학원[The Scarritt Bible and Training School], 즉 스캐리트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떠났다. 스캐리트신학교는 북감리교에서 미 국내 및 외국 선교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운영하던 2년제 특수 성경학교였다. 차미리사는 1910년 가을 학기부터 1912년 봄 학기까지 2년을 다니고 한인 최초로 스캐리트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스캐리트신학교는 일반 대학생과 2년 간 수학하는 시니어 반이 있었는데 차미리사는 시니어 반 출신인 것으로 보인다. “일천만 여성들을 광명의 길로 인도하겠다.”라는 큰 뜻을 품고 학업의 길에 들어선 차미리사는 1912년 8월 배화학당 교사 겸 선교인으로 파견되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차미리사는 1919년에는 3·1 운동 국내외 비밀 연락의 참모 역할을 하였다. 1920년 여성 교육을 위하여 허정숙, 나혜석 등과 조선여자교육회(朝鮮女子敎育會)를 조직하였고, 1920년 4월 19일 여자야학강습소를 설치하였다. 1921년 여자야학강습소를 확대 개편하여 부인야학강습소로 이름하고 건물을 확보하여 교육을 계속하였다. 1921년 10월 강연회에서 얻은 찬조금으로 근화여학교를 설립, 교장과 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9월 여성이 독립적으로 생활하기 위해서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며 근화여학교를 근화여자실업학교(槿花女子實業學校)로 개명하고 잠사, 농업, 기계, 건축, 회계 등을 가르쳤다. 여자에게 어떻게 힘든 노동과 실업에 종사하게 하느냐는 시중의 편견과 비난을 받았으나 실업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신념을 바꾸지 않았다. 1937년 10월 중일 전쟁 직후 ‘근화’라는 명칭이 무궁화를 상징한다는 일제의 시비에 따라 고민 끝에 명칭을 덕성학원(德成學園)으로 바꾸었다. 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폐교 위협을 받자 1938년 10월 차미리사는 재단 법인과 교명을 덕성(德成)으로 개명한 것이다.
광복 후 1945년 덕성여자실업학교는 덕성고등여학교(德成高等女學校)로 바뀌었고, 그 후 다시 학제의 변경에 따라 덕성여자중학교(德成女子中學校)와 덕성여자고등학교(德成女子高等學校)로 개편되었다.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하였다. 1952년에는 덕성여자대학교 이사장직에서 사임하였고, 3년 후인 1955년 6월 1일 사망하였다.
차미리사는 조선여자교육회의 기관지 『여자시론』을 발간하였다.
차미리사의 유해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차미리사의 공적을 기리어 2002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