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Mack Field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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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田明雲 |
영문 | Mack Field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캘리포니아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84년 6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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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02년 6월 |
몰년 시기/일시 | 1947년 11월 18일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출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거주|이주지 | 미국 하와이주 |
학교|수학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활동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
활동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시 |
활동지 | 러시아 연해주 |
원어 항목명 | Mack Fields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1907년 3월 2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친일 외교관 스티븐스를 처단한 재미 한인 독립운동가.
전명운(田明雲)[1884~1947]은 1908년 3월 23일 친일외교관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살인 미수’혐의로 샌프란시스코 경찰법원에 기소되었으나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윌로우스지방회 부회장으로서 국민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 시 기금 마련 활동을 하였으며, 한인국방경위대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전명운은 1884년 6월 25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전명운은 1902년 6월 2년제의 관립 한성학원(漢城學院)에 다녔다고 알려져 있다. 하와이 이민이 시작되자 이민선 도릭(Doric)호를 타고 1903년 9월 18일 호놀룰루항에 도착하였고 사흘간의 입국 심사와 이민 수속을 밟은 후 9월 21일 하와이에 들어올 수 있었다. 전명운도 하와이에서 1년간 노동을 하다가 이민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1904년 9월 23일에 미국 본토에 건너왔다. 공립협회에서는 토요일마다 공립관에서 토론회가 개최되었는데, 매주 토론회에 참석하여 국권 회복을 주제로 토론도 하고 연설도 하였다. 전명운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노동일을 하였지만 원하는 만큼의 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큰돈을 벌기 위해 알래스카에 가서 고기를 잡기로 하였다. 그러나 전명운의 강직한 성품 때문에 알래스카에서의 어업 일은 순조롭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명운은 동포들을 잘 돌봐주고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에 알래스카의 노동 주선을 맡게 되었다. 전명운은 재미 한인들에게 알래스카 어업을 주선하여 재미 한인 사회에 공헌하려고 하였다. 모든 일이 충분히 되면 알래스카로 떠나려고 할 때, 대한제국의 외교고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가 도미하였다.
스티븐스는 한국에 대한 망언을 일삼았던 친일 인물이었다. 스티븐스가 미국에 오자 1908년 3월 22일 오후 8시 공립협회와 각 단체가 공동 회의를 열고, 스티븐스 행동의 대책을 토의한 결과, 최정익·문양목·정재관·이학현 4명의 대표를 스티븐스가 투숙하고 있는 페어몬트호텔(Fairmont Hotel)에 보내 친일적인 망언을 취소하라고 요구하였다. 전명운은 스티븐스를 처단하기로 결심한 후, 스티븐스가 3월 23일 9시 30분에 샌프란시스코를 떠난다는 것을 미리 알고, 권총과 스티븐스의 사진을 가지고 페리 부두 선창에서 기다렸다. 9시 30분이 되자 스티븐스가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페리 부두에 일본 영사와 같이 도착하였다. 전명운은 자동차에서 내리는 스티븐스를 보고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총이 격발되지 않았다. 전명운은 스티븐스에게 달려가 스티븐스의 얼굴을 가격하였다. 일격을 당한 스티븐스는 전명운에게 달려들었고, 이 상황을 보고 있던 장인환이 총을 쏘아 첫 발이 전명운에게 맞고, 연달아 두 발이 스티븐스를 맞추었다. 1908년 3월 27일 총상으로 병상에 있던 전명운은 살인 미수 혐의로, 장인환은 계획에 의한 일급 모살 혐의로 각기 샌프란시스코 경찰법원에 기소되었으나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 후 1908년 8월 전명운은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동부로 피신하였고, 유럽을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갔다. 전명운은 1908년 10월 6일, 7일경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전명운은 연해주 지역에 머무는 동안 공립협회의 지회를 연해주 지역에 설치하였으며, 동의회에 참가하여 재러 한인 청년들과 많은 유대 관계를 맺었다. 그러다가 전명운은 1909년 10월 경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대서양을 건너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전명운은 의거 이후 평범한 일상생활로 돌아와 뉴욕에서 다시 캘리포니아 지역으로 갔다. 캘리포니아의 농장 지대인 맨티카 지방에 정착하여 세탁업을 하였으며, 1918년 12월에는 맨티카지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와 같이 전명운은 국민회 활동을 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919년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전명운은 맨티카를 비롯하여 이웃 스톡턴 등의 재미 한인들을 모아 대대적인 축하회를 열고 취지를 설명하였다.
그 후 전명운은 김종림을 비롯한 재미 한인들이 대규모 농장에서 벼농사를 하고 있는 윌로우스 지방으로 이거하였다. 전명운은 한인 노동자들을 위한 여관업과 노동 주선업을 하였다. 이 같은 생업 중에서도 국민회 활동은 계속되어 1919년 2월부터는 윌로우스지방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가을 전명운은 세탁 노동을 그만두고 철도 건널목 간수가 되었다. 1941년 12월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철도 건널목 간수일을 하면서 전시 봉사회를 조직해 기금을 마련하는 활동을 하였다. 특히, 전명운은 5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인국방경위대[Korean Brigade]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전명운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