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全得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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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83년 4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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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시기/일시 | 2012년 |
출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 문천군 |
거주|이주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
활동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활동한 재미 한인 독립운동가.
1906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공립협회, 국민회 등에서 활동하고 아시아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이다.
전득부(全得富)는 함경남도(咸鏡南道) 문천군(文川郡)에서 전석호(全錫浩)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내는 전 그레이스이다.
전득부(全得富)는 1896년 평양으로 이사하였고, 1906년 5월부터 8월 사이에 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07년 9월 안창호(安昌浩) 등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공립협회(共立協會) 샌프란시스코지방회에 가입하였다. 1908년 10월 독립군 기지 개척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아시아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1908년 10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 구제원, 12월 응접원으로 선임되었다. 1909년 2월 미주 한인의 통일기관으로 국민회[1910년 대한인국민회로 개칭]가 창립되자, 북미 지역은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로 편입되었다. 1909년부터 1924년까지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에서 1909년 재무·평의원, 1911년 총무, 1914년 재무, 1916년 총무, 1919년 독립 의연금 수전위원(收錢委員), 1920년 재무, 1922년 실업부원, 1923년 부회장, 1924년 법무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북미지방총회에서도 1920년 구제원과 구미주차위원부 지방 위원, 1921년 실업부원, 1923년 5월 민립대학후원회 발기인이 되었다. 1925년 3월 스톡턴(Stockton)지방회를 설립하였으며 1926~1927년 총무와 스톤턴 공제회 이사원 활동을 하였다. 1930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구제원으로 선임되었다. 1931~1932년 국민회 총회 구제원·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1932~1933년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재무도 겸하였다. 1940년 로스앤젤레스지방회 집행 위원 및 구제 위원, 1941~1943년 델라노지방회 감찰 위원·수전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식품점, 음식점, 양화점, 국수 장국집, 여관 등을 운영하며 1911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사망시기는 미상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전득부의 공적을 기리어 2012년 건국 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