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張仁煥 |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하와이주 캘리포니아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76년 3월 10일 |
---|---|
수학 시기/일시 | 1887년 |
수학 시기/일시 | 1892년 |
몰년 시기/일시 | 1930년 5월 22일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출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남도 평양 |
거주|이주지 | 미국 하와이주 |
활동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1907년 3월 2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친일 외교관 스티븐스를 처단한 독립운동가.
장인환(張仁煥)은 1905년 미국 하와이로 이주했다가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후 고된 노동을 하는 힘든 생활 중에도 고국을 걱정하다가 1907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친일 외교관 스티븐스를 처단하였다. 25년 금고형 판결을 받았으나 10년 8개월 후 가석방되었다. 이때 대한인국민회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1922년에는 북미총회의 부회장에 당선되었고, 1923년에는 대의원회 의장으로도 활동하였다. 1924년 완전히 석방되었다. 1927년 4월에는 고국으로 가서 사회사업에도 관여하고 결혼했으나, 둘 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서 1927년 10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그 후 형무소에서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투신자살했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6세 때 어머니 김씨가 사망하였고, 16세 때 아버지 장명구(張明九)가 사망하여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1927년 평양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생인 윤치복(尹致福)과 결혼하였다.
1876년 3월 10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장인환은 11살 되던 해인 1887년 공립학교에 입학하였지만 1892년 아버지가 돌아가자 경제적 어려움으로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다. 그후 1894년 잡화점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청일 전쟁이 발발하여 전쟁을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였다. 그리고 1895년부터 1903년까지 잡화 장사를 시작하였으나, 동업자의 배신으로 사업에 실패하고 하와이로 이민하게 되었다.
1905년 2월 2일 캡틱(Coptic)호를 타고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장인환은 하와이에서 1년 여간 노동을 하여 푼푼이 모은 돈으로 1906년 7월 미 본토인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다. 처음에는 샌 아르도(San Ardo)에 있는 철도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였고, 그 후 샌프란시스코 하이트(Haight)가에 있는 식당에서 일을 하였으며, 그 후 잭슨(Jackson)가에 있는 하숙집에서도 일을 하였다. 장인환은 큰돈을 벌기 위해 1907년 알래스카의 연어 통조림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1907년 9월 캘리포니아로 돌아왔다.
장인환은 미국 본토에서 노동에 종사하면서도 늘 고국을 걱정하였다. 대한제국의 외부(外部) 고문으로 일본의 정책에 적극 협조하고 있었던 미국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에 대한 분한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908년 3월 20일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스티븐스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마자 미국 신문기자들과 회견을 하면서 친일적인 망발을 일삼았다. 1908년 3월 22일 오후 8시 공립협회(共立協會)가 각 단체와 함께 공동 회의를 소집하였다. 스티븐스의 오만방자한 행동을 더 두고 볼 수 없다며 대책을 토론한 결과 최정익(崔正益)·문양목(文讓穆)·이학현(李學鉉)·정재관(鄭在寬) 4인을 페어몬트호텔에 보내 스티븐스로 하여금 그 기사를 정정토록 요구키로 하였다. 1908년 3월 22일 공립협회가 소집한 대책회의 석상에서 전명운(田明雲)은 스티븐스를 대항하겠다고 자원하였다. 스티븐스가 워싱턴 대륙 횡단 철도를 타기 위해 오클랜드 페리 부두 선창으로 갈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날 회의에서 장인환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고, 만일의 실수에 대비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다음날인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10분 샌프란시스코 페리빌딩(Ferry Building) 북쪽 약 20야드에서 일본 총영사 고이케 초조의 안내를 받으며 스티븐스가 페어몬트호텔 리무진에서 내렸다. 스티븐스가 막 걷기 시작했을 때 전명운이 다가와서 총을 쐈으나 총이 격발되지 않았다. 그러자 전명운은 스티븐스에게 달려가 얼굴을 가격하였다. 일격을 당한 스티븐스가 전명운에게 달려들었고, 스티븐스가 전명운을 때리려고 하자, 장인환이 총을 쏘아 첫 발이 전명운의 가슴에 맞았고, 두 번째 총알은 스티븐스의 어깨에, 세 번째 총알은 스티븐스의 하복부에 맞았다. 장인환이 쏜 총알을 맞은 스티븐스는 3월 25일 오후 11시 10분에 사망하였다.
경찰에 구속된 장인환은 살인 혐의로 3월 27일부터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은 장장 280일 동안 계속되었다. 12월 23일 상오 9시 반에 샌프란시스코 고등재판소 재판장 쿡의 법정에서 최후 재판이 열렸다. 12명의 배심원중에 7명은 사형을 주장하고, 다섯 명은 무죄를 주장하며 도저히 타협을 할 수가 없었다. 여덟 차례의 비밀 투표와 토론 끝에 ‘애국적 환상에 의한 2급 살인죄[Insane Delusion]’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1909년 1월 2일 쿡 판사는 25년 금고형으로 판결하였다. 25년 금고형을 선고받은 장인환은 샌쿠엔틴(San Quentin)주립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09년 1월 2일부터 죄수번호 23295의 수형 생활이 시작되었고, 장인환은 1919년 1월 10일 가석방을 허락받았다. 장인환은 가석방되었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를 떠날 수가 없었으나, 대한인국민회 사업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가 있었다. 1922년에는 북미총회의 부회장에 당선되었고, 1923년에는 대의원회 의장으로도 활동하였다. 10년간의 감옥 생활에서 배운 재봉업과 세탁업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였고, 1924년 4월 10일 완전히 석방이 되었다. 그 후 고국에서의 사회사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선천(宣川)에 대동고아원을 후원하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51세 때인 1927년 4월 29일 23년 만에 귀국을 하였고, 1927년 6월 10일 평양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생인 윤치복과 결혼도 하였다. 고국에서의 결혼 생활도 고아원사업도 뜻대로 되지 않아 1927년 10월 27일 샌프란시스코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미국에 돌아온 후 세탁업과 막노동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으나, 형무소에서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몸이 완전히 망가졌다. 1930년 5월 10일 공립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다가 병세가 위독해지자 다시 안식교회의 위생병원[Health Betterment Institute]에 입원을 하였다. 그러나 심한 통증으로 대소변을 볼 수도 없었고 밤이면 더욱 고통이 심해졌다. 심신의 고통과 건강이 회복될 것 같지 않다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1930년 5월 22일 창문을 열고 투신하여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장인환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