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Jang kyu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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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景 |
영문 | Jang kyu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몰년 시기/일시 | 1918년 1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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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거주|이주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
활동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미국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시 |
원어 항목명 | Jang kyung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대동교육회 총무 |
일제 강점기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에서 활동한 재미 한인 인삼 상인이자 독립운동가.
1903년 9월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를 결성하였다. 한인친목회는 북미 최초로 결성된 한인 단체이다. 한인친목회는 환난상부(患難相扶)를 목적으로 하여 동포 간의 연락과 친목을 도모하고 한인 사회의 생활 개선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자, 1905년 12월 안정수(安定洙)·방사겸(方四兼) 등과 더불어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서 대동교육회(大同敎育會)를 조직하고 총무로 선임되어 실질적으로 조직을 지도하였다. 1907년 3월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로 확대 개편하고 중앙 총무로 선임되었다. 대동보국회는 대한제국 황제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와 충성을 강조했으며, 재미 한인들의 국권 회복 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주력하고 유학 주선과 서적 출간, 신문 간행, 직업 알선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7월 일제에 의해 정미7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그 부당성을 주장하며 동포들의 궐기를 촉구하였다. 1907년 9월 상해로 건너가 11월 대동보국회 상해지방연회(上海地方聯會)를 설치하였다. 당시 상해에는 광무 황제의 밀명을 받아 무관 양성을 위해 30여 명의 학생들이 앞서 도착해 있었으나 계획이 어긋나면서 대책 없이 상해에 머물게 되자 대동보국회관을 만들어 머물게 했으며 대동학교(大同學校)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한편 샌프란시스코에서는 1907년 10월 대동보국회의 기관지 『대동공보(大同公報)』를 창간하고 민족정신을 고취하였으며 미주 본토에 10개소, 하와이에 3개소, 국내에 22개소, 중국에 1개소의 신문 발매소를 두었다. 1909년 2월에는 상해에서 한문 잡지인 『태동신보(泰東新報)』를 발간했으나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1호만을 발행하는 데 그쳤다. 미국에서는 청나라 보황회 계열 중국 교민의 후원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동보국회는 1910년 2월 국민회와 통합하고 대한인국민회로 발전적으로 개편되었다. 이후 1911년 도산 안창호, 안정근 등과 북만주 밀산 봉밀산 기지 개척지를 돌아보기도 했으나 조직 활동보다는 상해와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인삼 장사에 종사하였다. 1918년 1월 21일 싱가포르 여행 도중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장경의 공로를 기리어 1995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