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Chung Koo Y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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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任正九 |
영문 | Chung Koo Yim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하와이주 캘리포니아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87년 10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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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1년 9월 |
수학 시기/일시 | 1912년 9월 |
수학 시기/일시 | 1914년 8월 |
수학 시기/일시 | 1917년 12월 |
수학 시기/일시 | 1918년 9월 |
몰년 시기/일시 | 1939년 12월 28일 |
추모 시기/일시 | 2013년 |
출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남도 강서군 |
거주|이주지 | 미국 하와이주 |
학교|수학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클레어몬트시 |
학교|수학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
활동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
묘소 |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시 마운틴 뷰 공원묘지 |
원어 항목명 | Chung Koo Yim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 |
일제 강점기 미국 캘리포니아주 등에서 활동한 감리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
1905년 미국 하와이 이주 후 미주 감리교 한인교회에서 목회를 하며 공립협회, 클레몬트 학생양성소, 대한인국민회, 미주 한인연합회에서 활동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이다.
임정구는 평양에서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노블[William Arthur Noble]에게서 침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5년 과부인 어머니와 함께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1년간 어학 공부를 하고 시간제로 일하며 돈을 벌어 1906년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바로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공립협회에 가입하고 1906년 11월에 공립협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 경찰로 선임되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중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고 1908년 8월에 클레몬트 학생양성소의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08년 9월에 클레몬트에 있는 포모나대학[Pomona College] 예비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영어와 라틴어, 근대어, 역사, 수학, 과학, 성격 등을 수학하고 1911년 여름에 예비학교를 졸업하였다. 1909년에 클레몬트 학생양성소 재무, 1910년 4월에는 대한인국민회 업랜드지방회를 조직하고 평의원으로, 1911년에 업랜드지방회 대의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11년 9월에 포모나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두학기를 마치고 휴학하였고, 1912년 클레어몬트지방회 평의원 및 학무원 등을 지냈다. 1914년 8월에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버클리(Berkeley)대학 경제학부로 전학해 1917년 12월에 졸업하였다.
임정구는 1915년 6월 25일 황사용 목사의 뒤를 이어 오클랜드교회 지방 전도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목사 안수를 받고 1917년부터 1939년까지 오클랜드 교회 담임 목사를 하였고 새크라멘토, 멘티카, 스톤턴, 리들리 등지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다. 1916년 리버사이드지방회 대의원, 북미지방총회 실업부원, 1917년에 샌프란시스코지방회 대의원, 북미지방총회 학무원을 역임하였다. 1918년 9월에 산 안젤모에 있는 샌프란시스코 신학교[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 특별과정 학생으로 입학해 1학기동안 신학을 공부하였다. 1918년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회장, 총무, 북미지방총회 부회장, 학무원, 버클리학생양성소 설립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장인환 의사가 1919년 1월 10일 가출옥을 하자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에서 열린 장의사환영회 식장에서 개회를 선언하고 행사 취지를 설명하였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의회 의장, 북미지방총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이대위 목사가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을 사임하자 총회장직을 대리로 겸임하기도 하였다.
1920년부터 1928년까지 샌프란시스코지방회 대의원을 역임하였다. 1930년 미주 광주학생운동후원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미주 한인연합회 선전부장, 1934년과 1936년 대한인국민회 부회장, 1937년부터 1938년까지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 겸 구제 담당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1907년부터 1939년까지 지속적으로 국민 의무금, 독립 의연금 등을 지원하며 항일 의식 고취와 독립운동 자금 모집,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중국인과의 항일 공동 전선 결성 등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1939년 12월 28일 사망하였다.
임정구의 유해는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마운틴 뷰 공원묘지[Mountain View Cemetery]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임정구의 공적을 기리어 2013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