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휘

한자 李昌輝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미국 캘리포니아주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2년 3월 15일
몰년 시기/일시 1979년 5월 31일
추모 시기/일시 2001년
출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이천(伊川)
활동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1930년 5월 미국 네쉬빌에서 공부하다가 1937년 캘리포니아로 이주 후 대한인국민회,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 군사운동촉진위원회, 미국 전략첩보국에 속하여 조국 독립운동에 힘쓰고, 『독립』에 글을 기고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한 독립운동가이다.

활동 사항

이창휘는 1930년 5월부터 1937년 봄까지 내쉬빌에서 학업에 전력하였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중단하였고, 1937년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대한인국민회에 가입 후 민족운동에 힘썼다. 1942년 6월 조선의용대후원회가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로 개칭한 시기에 이창휘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에 가입하였다.

1943년 9월 독립신문사를 세우고 이사부 임원으로 선출되어 10월에 기관지 『독립[Korean Independence]』을 창간하였고, 230여 달러를 운영경비로 의연하였다. 1944년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UCLA]에서 일본어교수로 재직하고, 10월 재미한인사회의 군사운동을 확대 강화하고자 군사운동촉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창휘는 위원회 서기로서, 군자금 모집과 군사활동을 촉구하였다. 1945년 2월 14일 미군에 입대하여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미군 전략첩보국]에 소속되어 훈련을 받았다.

그 뒤 중국 시안[西安]에서 훈련하던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파견되어, 주로 일본어와 중국어, 영어 등의 정보문서 번역요원으로 활약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독립전쟁을 후원하였다. 해방 후 미국으로 돌아가 11월 28일 미군에서 제대하였다.

저술 및 작품

「조선사람의 기원」, 「독립신문사가 탄생되기까지」, 「우리의 당연한 임무」, 「단결을 향한 한 걸음[One step To Our Unification]」, 「연합회와 학생회 문제」, 「인도 국경에서 연합군은 실패인가」, 「타협은 어느 정도까지」, 「국제정세와 독립신문」, 「군사운동비 모집에 대하여」 등을 독립지에 기고하고, 민족의식 고취와 민족단결을 촉구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창휘의 공로를 기리어 2001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NAPKO PROJECT OF OSS-재미 한인들의 조국 정진 계획』(국가보훈처, 2001)
  • 『독립』(1943. 10. 6, 10. 27, 12. 22, 1944. 1. 5, 2. 16, 3. 1, 4. 13, 4. 19, 6. 7, 9. 6, 10. 25)
  • 김원용, 『재미 한인 50년사』(혜안, 2004)
  • 김준, 『동포사랑 가슴에 안고-이창휘선생 유고 및 회고의 글』(시애틀한인생활상담소, 1997)
  • 방선주, 「미주 지역에서 한국 독립운동의 특성」(『한국독립운동사연구』7,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3)
관련항목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