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Hurn Joo S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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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憲澍 |
영문 | Hurn Joo So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80년 10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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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07년 |
수학 시기/일시 | 1910년~1914년 |
수학 시기/일시 | 1915년 |
몰년 시기/일시 | 1965년 7월 31일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출생지 | 대한민국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 |
거주|이주지 | 미국 하와이주 |
활동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시 |
원어 항목명 | Hurn Joo Song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활동한 교육가이자 독립운동가.
송헌주(宋憲澍)는 1880년 10월 22일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 62통 9호[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에서 송득인과 창녕 성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송헌주는 1903년경 한인 이민 노동자들의 통역으로 하와이로 이민하였다. 1905년 하와이 이민국 사무직원으로 근무했고 고할라 지방 제일한인감리교회 목사로서 목회하며 『포와한인교보(布哇韓人敎報)』를 발행하였다. 1905년 8월 호놀룰루에서 한인상조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임되어 한인의 자치에 힘썼다. 광무 황제(光武皇帝)의 밀명으로 만국평화회의 통역관으로 내정되어 1906년 3월 대한제국 여권을 발급받아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하였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로 가서 만국평화회의 대표로 참석한 이상설과 이위종 특사 통역관으로 활동하였고, 1908년 7월 덴버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회에 참석하였다.
1916년 3월 하와이 호놀룰루 한인중앙학원 교장으로 초빙되었다. 1919년 3·1 운동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 기관인 워싱턴 구미위원부 위원 장재(掌財)로 임명되어 애국 공채 발매와 독립 의연금 모금 활동을 했으나 이승만(李承晩)과의 갈등으로 해임되었다. 1929년 로스앤젤레스 국어학교 교육 위원과 교육 부장을 맡고, 1930년 1월 30일 로스앤젤레스의 한인공동회에 참여하였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미주 한인 전체가 집중하여 임시 정부를 후원하려고 미주 한인연합회를 결성하자, 집행부 사무장으로서 미주 인구세 수납 업무를 일임했다. 1935년 로스앤젤레스 국어학교 삼일학교 교장직을 맡았다. 1936년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건축 위원장으로 건축 기금 모금에 전력하여 1938년 4월 낙성되었다.
1939년과 1943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어 민족 전선의 통일과 임시 정부 승인을 위해 노력하고 미국의 대일 항전 참전을 후원하였다.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 해외한족대회 후 조직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국방과의 과장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과 외교 사업을 추진하였다. 1941년 12월 로스앤젤레스에 한인국방경위대[일명 맹호군]가 편성되자, 1942년 2월 한인경위대 외교와 정위로 임명되어 매주 군사 훈련을 받고 대일 항전을 준비하였다. 1943년 9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국방과장, 1944년 1월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45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국제연합 창립총회의 한국 대표단으로 선임되어 한국 독립을 요청하는 외교 업무를 맡았다. 1965년 7월 31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송헌주의 공적을 기리어 1995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