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Joon Ho By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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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卞俊鎬 |
영문 | Joon Ho Byu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95년 12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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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2년~1913년 |
수학 시기/일시 | 1916년 |
수학 시기/일시 | 1920년대 중반 |
몰년 시기/일시 | 1966년 2월 20일 |
추모 시기/일시 | 1997년 |
출생지 | 대한민국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 |
거주|이주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
학교|수학지 | 미국 일리노이주 |
활동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시|미국 워싱턴주|미국 뉴욕주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
원어 항목명 | Joon Ho Byun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미국 서부 지역에서 활동한 언론인이자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1895년 12월 1일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楊平郡 葛山面 陽根里) 304번지에서 아버지 변세영(卞世永)과 어머니 이희(李姬)의 2남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7년 미국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돈벌이하면서도 학업에 열중하여 역사·수학·물리·한문·영어·일어 등에 능통하였다. 1919년 5월 창단된 청년혈성단(靑年血誠團)에 가입, 활동하였다. 1920년 3월 7일 흥사단에 입단하였다. 1930년 10월 18일 시카고의 진보적 한인 학생 및 청년들과 사회주의 사상 단체인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하고 초대 재무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기고문과 논설 등을 통해 재미 한인 사회에 사회주의 사상 전파에 주력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 후 중국후원회를 만들어 대일 항전을 지원하였다. 1938년 중국 조선의용대가 결성되자 뉴욕에서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를 결성하고 배일 선전과 군사 후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
1940년 5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조선의용대후원연합회(朝鮮義勇隊後援聯合會)를 결성하고, 1941년 4월 하와이 해외한족대회에 조선의용대 미주후원연합회 대표로 참가하였다. 미주후원연합회가 1942년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로 개편하자 위원장에 취임하여 군사운동촉진위원회를 구성하고 12월까지 수합한 군자금을 임시 정부 군부총장 김원봉(金元鳳)에게 보냈다. 1943년 10월 기관지 『독립(獨立)[Korean Independence]』 창간호를 간행하고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논설을 기고하여 언론 활동을 펼쳤다. 1944년 임시 정부 국무 회의에서 주미외교위원부를 주미외무위원회로 개조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워싱턴 외무위원회 위원 겸 샌프란시스코회의 파견 대표로 선임되었다. 1945년 1월 김강, 이경선 등과 함께 한인 모병 임무를 담당하던 함용준의 제안에 따라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 당원 10명과 함께 미국 전략첩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OSS]에 입대하여 민간인 요원으로 냅코 작전[Napko Project]에 발탁되었다. 1948년 미국 공산당 내 한국인 대표로 활동하였다. 1966년 2월 20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로즈데일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고향 마을 선산에 이장되었고, 2007년 9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최종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변준호의 공적을 기리어 1997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