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Hwa Joong Bha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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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邦化重 |
영문 | Hwa Joong Bha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시 하와이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8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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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40년 12월 11일 |
추모 시기/일시 | 2014년 |
출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도 안악군 |
활동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시|미국 하와이주 |
원어 항목명 | Hwa Joong Bhang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미국 서부지역에서 한인 단체 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887년(고종 24) 황해도 안악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방기창(邦基昌)[1851~1911]은 1883년 동학의 황해도 접주 겸 오읍 도령장으로 활동하다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여 장대현교회 초대 장로가 되고,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으로 목사가 되었다.
1904년 도미하여 11월 11일 안창호(安昌鎬)가 조직한 상항 친목회에 가입하고, 1905년 4월 상항 친목회가 공립협회로 개편된 후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했으며 1905년 11월 22일 공립협회가 『공립신보』를 창간하자 1907년 3월까지 편집인이자 주필로 활동하였다. 공립협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에 1905년 4월부터 1907년 9월까지 활동하였다. 1907년 6월에는 로스앤젤레스에 한인장로교회 를 설립하고, 7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장로교 및 감리교 대표들과 함께 「한인연합교회보 발간 취지서」 발표 후 『한인연합회보』를 발간하였으며, 8월에는 국채 보상 운동을 위해 의연금을 기부하였다. 1907년 12월 공립협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 회장 대리를 거쳐 1908년 1년간 회장을 역임하였다.
1908년 2월 농상공업의 근본을 양성한다는 취지로 로스앤젤레스 한인 7명과 함께 권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08년 8월 강영대 등과 클레몬트에 한인학생양성소를 설립하여 총무로 활동하였다. 농장 계약이 만료된 멕시코 한인들을 돕기 위해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특파원으로 멕시코로 가서 1909년 5월 국민회 메리다지방회를 설립하는 등 특파원 임무를 수행하였다. 1909년 7월 북미지방총회 대의원, 12월 북미지방총회 구제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로스앤젤레스지방회 외교원으로 활동하였다.
1911년 4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학무로 선임되어 클레몬트 한인학생양성소를 위한 의연금을 모집하고, 8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설립되자 중앙총회의 학무원이자 서기대리로 활동하였다. 1916년 4월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1917년 5월 30일 하와이 감리교회의 초청으로 호놀룰루로 건너가 1918년 9월 폐교 위기에 놓인 하와이 한인중앙학원의 이사부장과 교장으로 활동했다. 1919년 5월 미주한인학생 원동선교회를 조직하고 하와이 지방 선교를 위한 지방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2월 한국 내 기근 참상 소식을 듣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조국동포구제회를 조직해 모금하여 국내 조선기근구제회 회장 이상재에게 송금하였다. 4월에는 임시 정부가 구미위원부를 폐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공동회를 열어 구미위원부를 옹호하고 임시 정부의 처사에 반대하였다. 1928년 2월 뉴욕에서 한인들과 「삼일신보 창간 취지서」를 발표하고 『삼일신보』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방화중의 공훈을 기려 2014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