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Samuel K. Bha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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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方四兼 |
영문 | Samuel K. Bha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캘리포니아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81년 7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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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09년~1917년 |
수학 시기/일시 | 1910년 6월 |
수학 시기/일시 | 1913년 여름~1915년 여름 |
몰년 시기/일시 | 1955년 12월 8일 |
추모 시기/일시 | 2011년 |
출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남도 평양 |
거주|이주지 | 미국 하와이주 |
활동지 | 미국 |
원어 항목명 | Samuel K. Bhang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미국 서부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1881년(고종 18) 7형제 중 5남으로 출생하였다. 아버지 방정우는 어물전을, 형은 객주를 하는 평양의 부호 집안 출신이었다. 매형 차종호와 함께 1904년 1월 16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해 길노이 사탕농장에서 노동하였다.
1905년 12월 9일 대동교육회(大同敎育會) 창립 때부터 1907년 1월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로 개편된 후 회원 모집과 지방회 설립에 주력하였고, 덴버 지역 수봉 위원이자 대동공보 덴버지사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6월 한인소년병학교에 입학해 군사 훈련을 받고 독립정신을 배양시켰다. 1912년도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17년 8월부터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가 주도한 신한민보사 채무를 갚는 데 앞장섰다. 1918년 5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인구 등록 업무를 시작하자 스톡턴 지역 한인 인구 등록과 독립 의연금·애국금 등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12월 북미 대한인국민회에서 성탄 구제금을 모집하자, 맨티카지방회 한인들과 함께 기부하였다. 1923년 6월 시카고 한인들과 한국독립연구회를 창립하고 간사로 활동하였다.
1916~1919년간 국민 의무금, 대표 의연·독립 의연·21례금·애국금·공채표 등을 의연하고, 1930~1945년간 독립금, 『신한민보』·『북미시보(北美時報)』 대금, 인구세, 중국 항일 전쟁 동정금, 본국의 수재 동정금과 한재 의연금 등 각종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하였다. 1945년 9월~1946년에는 정부 후원금, 독립금, 동지회 인구세와 연례금, 『북미시보』 대금과 기계 특연금을 후원하였다. 1948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유엔 총회에 파견된 한국 대표단의 비용 부족으로 미화 2천 달러의 거액을 요청하자 송금해 주기도 하였다.
각종 신문에 기고문을 보내 미주 한인들의 단결과 통합을 역설하였다. 1925년 3월 19일~4월 2일간 『신한민보』에 「재미한인의 경제곤란」 3회, 1930년 9월 11일과 18일 『신한민보』에 「재미 한인의 통일이 되고 안 되는 것은 재미 한인의 애국에 있다」, 1931년 7월 30일~8월 13일간 『신한민보』에 「한인 통일의 이해관계, 하와이 사회 풍파는 혁명으로 볼 수 있다」는 3회, 1931년 12월 17일 「만주 중일 충돌에 인하여 일어나는 재미 한인 연합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을 게재하였다. 1944년 6월 15일~9월 15일간 동지회 기관지 『북미시보』에 「독립, 군사, 외교, 선전 4대 운동에 민중 합동이 필요」를 게재하여, 이승만(李承晩)의 외교 활동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1945년 4월 11일~6월 6일까지 조선민족혁명당 북미총지부 기관지 『독립』에 「독립의 가치와 그 세력」이란 글을 3회, 1945년 6월 15일~9월 1일 『북미시보』에 「평화회에 대한 우리의 할 일」을 3회, 1945년 8월 2~30일 『신한민보』에 「대한 독립 이후에는 미포 한인의 할 일이 무엇인가」를 4차례 연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12월 1일부터 1946년 2월 1일까지 「우리나라를 국제 관할 밑에 둔다고」를 연재하여 신탁 통치를 반대하고, 1946년 8월 20일 『북미시보』에 「조선의 현상과 장래」란 글을 기고하여 남북한이 연합 정부를 조직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였다. 한편, 로스앤젤레스에서 말년을 보내며 1952년부터 3년간 자신의 생애와 활동을 정리한 『평생 일기』 7권을 집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방사겸의 공훈을 기려 2011년 건국 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