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Sang Ha Par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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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相夏 |
영문 | Sang Ha Park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81년 7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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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69년 4월 19일 |
추모 시기/일시 | 2005년 |
출생지 | 대한민국 충청남도 은진군 |
거주|이주지 | 미국 하와이주 |
활동지 |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시 |
원어 항목명 | Sang Ha Park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활약한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
박상하(朴相夏)는 1881년 7월 20일 충청남도 은진군(恩津郡)에서 출생하였다. 미국명은 Sang Ha Park이고, 한문명은 朴尙夏(박상하)라고도 표기하였다. 하와이로 이민하여 1907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대한제국의 부흥과 교육 장려를 목적으로 김익성 등과 함께 전흥협회(電興協會)를 설립하고 전흥협회 기관지인 『전흥협회보』 주간을 지냈다. 1909년 공립협회와 하와이 한인합성협회가 통합하여 국민회가 출범했을 때는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의 서기 겸 재무 책임을 맡았고, 1912년에는 총무로 선출되고 하와이지방총회 헌장 기초 위원으로서 헌장을 기초하였다. 1912년 11월 8일 개최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1차 회의에 윤병구와 함께 하와이 대표로 출석하였다.
1913년 11월부터 1914년 1월까지 하와이지방총회장을 역임하였고, 호놀룰루 한인감독교회 목사로 부임하고, 하와이 한인청년회 이사부 임원 겸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하와이 『신한국보』와 『국민보』 주필을 역임하면서 하와이 교민 사회 통일에 기여하였다. 1925년 만주 일대에 독립운동 기지 개척 사업을 위한 저축 회사를 설립하고 설립 자금 모금을 위해 하와이로 건너온 박용만과 저축 회사 설립 위원회를 조직하고 이사로 활약하면서 많은 독립 의연금을 기부하였다. 1934년 6월부터 1936년까지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 총무를 맡았고, 1934년 11월 대조선독립단과 대한인국민회 통합을 주선하여 통일 운동에 기여하고, 1937년 11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봉대하기 위해 국민회 대표로서 동지회와 국민회의 합동 운동에 참여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가 개최한 국민대회에서 “일본 역사는 약 2,500년인데, 그중 2,000년은 시시로 한국을 침략하여 온 영구적 원수올시다. 필경 그들 손에 우리가 독립을 잃은 지 수십 년 만에 우리는 혈전의 기회를 기다리던 것이오. 지금 기회가 왔으니 우리 천추만세(千秋萬世)의 원수를 물리치는 것이 할 일이올시다.”라고 연설하였다. 1941년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 총지부 집행 위원 겸 조직 부장에 선출되고, 1943년에 국민회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국민보』 1944년 10월 25일자에 ‘애국 동포에게 호소함’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임시 정부의 군사 활동 지원을 호소하였다. 해방이 되기까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위원장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69년 4월 19일 78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박상하의 공로를 기리어 2005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