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Charles H. K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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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乎 |
영문 | Charles H. Kim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들리시 로스앤젤레스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84년 5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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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68년 1월 5일 |
추모 시기/일시 | 1997년 |
출생지 | 대한민국 서울 소안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
활동지 | 미국 콜로라도주 푸에블로시|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들리시|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시 |
원어 항목명 | Charles H. Kim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미국 지역 한인 단체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
1884년 5월 25일 서울 소안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에서 김후규(金厚圭)의 3대 독자로 출생하였고 기독교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1900년에는 전라북도 전주에서 충청도 출신의 이숙종(李淑鐘)과 결혼하여 아들 김영한(金玲漢)과 김경한(金景漢), 딸 김한숙(金漢淑)을 두었다.
김호는 1906~1907년 대한자강회 인천지회 회원으로 한말 애국 계몽 운동에 참가하였다. 1914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이던 이대위 목사의 도움으로 입국한 후,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재정 자금을 의연하였다. 1918년 4월 14일 김원용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산하에 푸에블로지방회를 설립하고 친목과 한인 사회 치안 유지에 힘썼다.
1919년 3월 17일 안창호(安昌浩)의 임명으로 9개주 한인 동포의 의연금 모집과 애국심 고취를 위한 ‘특파 위원’으로서 기금을 모아 상해 임시 정부 수립에 기여하고, 5월에는 변준호(卞俊鎬) 등과 함께 청년혈성단을 조직했으며, 12월에는 조소앙(趙素昻)의 유럽 외교 지원과 노동·사회 발전을 위해 대한인노동사회개진당을 조직하였다. 1920년 9월 10일에 김종림(金宗林) 등과 함께 캘리포니아 중부 리들리 지역에 리들리건제회사를 설립하고 총무로서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 힘쓰고, 김형제상회를 세우고 사업에 성공하여 한인 사회 발전과 독립운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30년 중가주 한인공동회를 설립해서 광주 학생 운동을 후원하고, 1931년에는 인구세와 의연금을 임시 정부에 송금하는 일을 맡았다. 1937년 중일 전쟁 때는 임시 정부 구호 특별 의연금·중국 항일 전쟁 후원금·국민 부담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1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결성되자 초대 위원장에 취임하여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1942년 로스앤젤레스 시청의 현기식에서 항일 전쟁의 승리와 자주 독립의 열망을 전 세계에 알렸다.
김호는 1945년 11월 한국으로 귀국하여 미 군정청에 「조선의 자주독립 촉성」이라는 건의안을 제출하고, 1946년 김규식(金奎植)을 지원하며 다방면으로 정부 수립에 관여했으나, 1948년 이승만(李承晩)이 집권하면서 정치적으로 소외되며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1957년에 김형순 부부와 함께 후진 양성과 조국 건설에 일조하기 위해서 리들리 한인재단을 설립하였고, 1959년 김원용에게 집필을 의뢰하여 『재미 한인 오십년사』를 간행하는 등 나라를 위해 애쓰다가 1968년 1월 5일 로스앤젤레스의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묘소는 2002년 3월 캘리포니아 중부 리들리에서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