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Yong Jeung Kim |
---|---|
한자 | 金龍中 |
영문 | Yong Jeung Kim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98년 3월 2일 |
---|---|
수학 시기/일시 | 1927년 |
몰년 시기/일시 | 1975년 9월 6일 |
추모 시기/일시 | 2000년 |
출생지 | 대한민국 전라북도[현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중도리 |
거주|이주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시 |
활동지 | 미국 워싱턴주|미국 하와이주|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시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
원어 항목명 | Yong Jeung Kim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한 실업가, 언론인, 독립운동가이자 민족 통일 운동가.
김용중(金龍中)은 1898년 3월 2일 전라북도[현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중도리(錦山郡 錦山邑 中島里) 347번지에서 아버지 김일택(金逸澤)과 어머니 박순화(朴順和)의 2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다. 17세 되던 1915년 혼인하고 1916년 딸을 낳았으나 가족과 헤어져 1916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가 미국으로 이민하였다. 1934년에 김형순(金衡珣)의 맏딸 김영옥[메리앤 김(Mary Ann Kim)]과 결혼하였다.
중국에서 여운형(呂運亨)[1886~1947]을 만난 인연으로 미국에 유학하여 고등학교 과정부터 공부하였다. 1928년 5월 송철(宋哲)과 함께 케이 앤드 에스 자버(K & S Jobber)를 설립하고 로스앤젤레스 시장에서 각종 과일, 채소를 위탁 판매하였다. 1939년 1월 대한인국민회 제3차 대표대회에서 중앙 집행 위원, 1940년 12월 대한인국민회 제5차 대표대회에서 중앙상무위원회 선전 위원에 선임되었다. 1941년 4월 하와이 해외한족대회에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가하여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선전 과장에 선임되어 한국광복군과 미군 합동으로 일본 격파를 결의하였다.
1941년 12월 29일 임시 정부 산하 주미외교위원부와 협조하고 태평양 전쟁 때 재미 한인들의 신분 보장과 임시 정부의 승인을 얻고자 노력하였다. 1942년 2월 대한인자유대회를 통해 동포들이 단합과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호소하고, 1943년 워싱턴(Washington D.C.)에서 한국인과 연합국의 친선을 도모하고 연합국의 승리를 돕고자 한국사정사(韓國事情社)[Korean Affaires Institute]를 설립하고 영문 월간지 『한국의 소리(Voice of Korea)』를 간행하여 미국 사회에 한국 실상과 독립의 필요성을 알렸다. 1919~1945년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하였다. 1945년 11월 4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국내 파견 대표로 한국에 귀국해 국가 건설 운동에 참여하고 ‘중립화 통일론’을 주창했으며, 1947년 7월 22일 미국으로 돌아가 한반도 통일 운동을 계속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