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Sung Kwon K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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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聲權 |
영문 | Sung Kwon Kim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미국 하와이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75년 2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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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60년 1월 20일 |
추모 시기/일시 | 2002년 |
출생지 | 대한민국 경상남도 진주시 |
거주|이주지 | 미국 하와이주 |
묘소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시 로즈데일 공동묘지 |
원어 항목명 | Sung Kwon Kim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대한인국민회 수전위원|흥사단 의사부장|조선민족혁명당 집행위원장|독립신문사 사장 |
1904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민하여 항일 운동에 투신했던 독립운동가.
김성권(金聲權)은 1875년 2월 15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김용한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문물에 대한 관심으로 1902년 일본을 거쳐 1904년에 미국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김성권은 하와이 오아후섬의 에와 농장에 배치되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일하면서, 동포 간 친목과 국권 회복을 위한 결사 단체인 한인상조회를 조직하였다. 1905년에는 정원명·강영소(姜永韶) 등과 함께 일본 제품 불매 운동과 동포 간 친목 및 환난상구(患難相救)를 위해 에와 친목회를 결성하고, 『친목회보』의 주필로 활약하며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 마련에 매진하였다. 1907년에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24개 한인단체 합동발기대회를 통해 연합 단체라 할 수 있는 ‘한인합성협회’ 창립에 일조하고, 기관지인 『한인합성신보』 주필로 활약하였다. 1908년 7월에는 덴버에서 박용만이 주도한 애국동지대표대회에 한인합성협회의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여 국민회의 탄생에도 동참하였다. 1919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수전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미국 서부 지역을 순회하여 독립운동 자금 마련에 힘썼다.
김성권은 안창호(安昌浩)[1878~1938]가 창설한 흥사단 단원으로서 크게 활약하기도 하였다. 김성권은 1913년 12월 9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대위 목사 주례로 강혜원과 결혼하였고, 결혼 후 부인 강혜원은 이름을 김혜원으로 바꾸고 김성권과 함께 다뉴바 농장에 이주해서 과일 따는 일에 종사하면서, 부부가 함께 흥사단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김성권은 1919년 4월에 흥사단에 가입하여 단우 번호는 91번이고, 김혜원은 1922년에 흥사단에 가입하여 단우 번호가 155번이다. 김성권은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흥사단 의사부장과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김성권은 1943년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9월 변준호·최능익 등과 함께 혁명당 미주지부 기관지인 『독립』 신문사 사장으로 활동하였다. 일본 패전 후 독립을 맞이하자, 1945년 12월 31일에 구용서·김문성·백두진·최순주 등과 함께 조선은행 이사로 임명되었다. 김성권은 1960년 1월 20일, 85세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성권의 공적을 기려 2002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