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도인

한자 權道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미국 하와이주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8년
활동 시기/일시 1941년 9월
몰년 시기/일시 1962년 4월
추모 시기/일시 1998년
출생지 대한민국 경상북도 안동시
거주|이주지 미국 하와이주
활동지 미국 하와이주
성격 애국지사
성별
대표 경력 국방공채위원회 부회장
정의

일제 강점기 미국 하와이주 지역에서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권도인은 1888년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출생했다.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미국 하와이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사업가이다. 대한인국민회 재무,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등을 재정적인 부분에서 적극 지원하였다. 1962년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권도인은 1905년 하와이에서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서 이민 생활을 시작했고 계약이 종료되자 1910년경 호놀룰루에서 점원으로 근무하였다. 1912년 사진신부로 하와이에 도착한 이희경과 결혼하였다.

1919년 3·1 운동의 성과로 상해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고, 미주 지역은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임시 정부에 재정적 지원을 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권도인은 1920년대초 대나무 발에서 착안한 커튼을 개발해 1924년에 특허를 취득했고, 1928년에는 포인시아나 블라인드(Poinciana Blind)라는 가구점을 개점하였다. 1929년 대공황으로 경영 위기가 찾아왔으나 1936년에 다시 가구점을 경영하면서, 임시 정부에 재정적 지원을 하며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하였다.

권도인은 1937년 8월 27일, 중일 전쟁의 여파로 하와이 국민회 총회를 통해 독립군 활동 지원금을 보내고 독립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의연금을 납부하기로 결정했다. 아울러 ‘비상시를 대비하기 위해’ 재무부, 선전부, 기밀부로 조직된 찬무부를 조직하고, 권도인은 재무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7년 10월 20일 국민회와 동지회 간 통합 문제를 논의할 당시,한길수, 김원용, 정인수와 함께 국민회 위원으로 선출이 되어 통합 작업을 진행했다. 1938년 미국 국방과 안전을 위한 방첩 활동 및 반일인 선전 활동에 주력하고자 중한민중동맹단이 공식 설립되자 이사원으로 활동하였다. 1939년 조선의용대 후원을 위해 결성된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에서도 활동하였다. 1941년 4월 16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북미와 하와이 지역의 9개 협회가 통합을 목적으로 해외 한족 대회를 준비하던 당시,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대표이던 황사용이 갑자기 사임하고 권도인으로 교체되었다.

권도인은 1940년 10월 13일 미주 지역의 6개 독립운동 단체 대표들이 모여 결성한 연합한인위원회의 훈련부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아울러 1941년 9월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미국의 국방 공채를 매입하여 후원하자는 분위기 속에서 국방공채위원회가 설립되어 양유찬이 회장으로, 권도인이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던 권도인은 1950년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고생하다가, 1962년 4월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권도인의 공훈을 기려 1998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홍선표, 『(자주 독립과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재미 한인의 꿈과 도전』(연세대학교 출판부, 2011)
  • 민병용, 『애국지사의 꿈』(밝은미래재단·한인역사박물관·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2015)
  • 최기용, 「조선 의용대와 미주 한인 사회」(『한국근현대사연구』11, 한국근현대사연구학회, 한울, 1999)
  • 「하와이 노동 이민 1세대 권도인, 이희경 부부」(『 매일신문』, 2010. 1. 11)
  •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https://knamf.org)
  • 한인역사박물관(http://kahistorymuseum.org)
관련항목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