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 역사/근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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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미국 캘리포니아주 다뉴바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제작 시기/일시 | 1920년 3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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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다뉴바에서 열린 삼일절 행사 녹화 자료 및 사진.
1914년 5월 20일 다뉴바(Dinuba)에 국민회의 북미지방총회 지방회가 설립되면서 바야흐로 다뉴바를 중심으로 한 중부 캘리포니아 지역 한인 역사가 시작되었다. 회장 장춘경, 부회장 이운옥을 중심으로 한 다뉴바지방회는 1914년 7월 자치제를 제정하고 경찰원과 상주원을 두기로 결의하였다. 다뉴바 현지의 관리가 이대위 북미총회장에게 많은 한인들이 피땀으로 번 돈을 인근 차이나타운의 잡기장[아편과 도박]에서 낭비한다고 통지함에 따라 북미총회가 미주 한인 사회의 자치권을 미국 정부로부터 얻은데 따른 결과였다.
다뉴바는 원래 한인들이 포도 따기를 위해 들어온 곳으로, 한인 주선인이 없었으므로 백인과 일본인 농장주 밑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08년부터 4.05㎢[1,000에이커] 규모로 포도밭을 계약하여 수확기에는 150~200명[많을 때는 200~300명]의 동포들이 모여들어, 다뉴바는 본토에서 한인들의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곳의 하나로 부상하였다. 한인수가 증가하자 1912년 8월에 민찬호 목사 부부가 남장로교 순행 목사로 찾아와 설교했고, 이어 한인들과 가까운 스튜워트 부인도 미국 목사를 대동하고 2주간 머물렀다. 다뉴바가 한인 계절노동자들의 붐타운으로, 신흥 도시로 부상하면서 1916년 8월에 ‘다뉴바 학생친목회’가 결성되었고, 회원은 40명이었다. 1918년에는 회장 김창만의 주도로 홍언 원작의 「미인심」이라는 연극까지 공연하였다.
1910년대 말에서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다뉴바는 철새 노동자와 유학생 중심에서 가족 위주의 붙박이형의 인구가 늘면서 점차 안정된 사회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사진 신부들의 다뉴바 유입이 붙박이형 인구 구성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으며, 김호(金乎), 이살음(李薩音), 최능익(崔能翊) 등의 엘리트 및 사업 수완이 뛰어난 김형순(金衡珣) 등의 유입으로 다뉴바 한인들이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경제 규모도 확대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3·1 운동이 발발하여 다뉴바 지역 한인들이 민족의식의 고취와 함께 항일 운동을 크게 일으키게 하였다. 바로 뒤인 1919년 8월 5일 다뉴바에서 대한여자애국단이 창설되었으며, 1920년에는 다뉴바에서 삼일절 행사를 크게 진행하였다. 「1920. 3. 1. California Dinuba에서」라는 자료에는 그날의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는 축하 행진과 모임 관련 자료들이 있다.
1920년 캘리포니아의 다뉴바(Dinuba) 삼일절 행사 관련 자료는 사진 원본 및 비디오 형태의 자료이다.
「1920. 3. 1. California Dinuba에서」라는 자료 중에는 1920년 3월 1일 행사 관련 사진이 있다. 또한 「Arirang」이라는 비디오에 다뉴바의 행사가 포함되어 있으며, 다뉴바 지역에서 과수원을 하던 ‘김 형제[Kim Brothers]’의 가족 중 한명이 촬영한 16㎜ 필름 원본이 있다. 이 자료들은 현재 남캘리포니아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USC]에 소장되어 있다.
다뉴바는 원래 한인들이 포도 따기를 위해 들어온 곳으로, 1910년대에는 한인 계절노동자나 유학생이 많았다. 한인의 수가 증가하면서 민족 지도자인 민찬호 목사 부부가 남장로교 순행 목사로 찾아와 설교도 하고, 회원 40명의 다뉴바 학생친목회가 결성되어 한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활동도 하였다. 1920년대 들어 가족 위주의 붙박이형의 인구가 늘면서 점차 안정된 사회 형태를 갖추고 김호, 이살음, 최능익 등의 엘리트 및 사업 수완이 뛰어난 김형순 등의 유입으로 한인들이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경제 규모도 확대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발한 3·1 운동은 다뉴바 지역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항일 운동이 크게 일어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