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韓美勝戰後援金募金活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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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미국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4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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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재미 한인들은 미국의 참전을 후방에서 지원 활동을 하기 위한 역량 결집에 나섰다. 한미 승전 후원금 모듬 활동은 1940년 10월 6개의 단체가 연합해서 만든 연합한인위원회 결성에서 비롯되었다.
미일 전쟁 발발 직후인 1941년 12월 7~9일 미주 지역 전체 한인 대표 조직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도 긴급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미국 국방 후원 활동을 결의하고 미국 재무부 국방공채국의 위임을 받아 본격적인 국방 공채 발매 활동에 나섰으며, 1943년 5월 이를 촉진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미전시저금위원회를 별도로 조직하였다. 1943년 1월에는 국방공채위원회의 명칭을 한미공채위원회로 바꾸었다. 1943년 7월부터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도 한미승전후원금모집위원회를 결성하면서 전체 미주 지역으로 모금 운동이 확대되었다.
한미승전후원금모집위원회의 집행부는 위원장 정덕흥, 재무 김원용으로 구성되었다. 모금한 승전 후원금은 모두 하와이 군정부에 전달되었고, 기간 종료 후 모금된 429달러는 미국 적십자사 하와이지부에 기부되었다.
하와이 한인들이 주도하여 북미 지역에서 1944년까지 발매한 국방 공채 금액은 65~70만 달러로 보고되고 있다.
미주 지역 한인들이 미국의 승전을 후원하는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미국 내 한인들의 자존감과 역량을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패전과 미국의 승전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기대치를 강화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