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Primero Mine Explos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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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 Primero Mine Explos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미국 콜로라도주 |
시대 | 근대/개항기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0년 1월 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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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항목명 | Primero Mine Explosion |
1910년 1월 31일 미국 콜로라도주 프리메로 지역에 있는 석탄광에서 9명의 재미 한인 노동자가 희생되었던 대형 광산 사고.
프리메로 탄광 폭발 사건은 1910년 1월 31일 콜로라도주 남단, 뉴멕시코주와 경계에서 가까운 스미스 캐니언(Smith Canyon)에 있는 프리메로(Primero) 석탄광에서 가스 폭발로 75명 이상의 광부가 참몰 당한 대형 사고이다. 희생자 가운데 한인들도 9명이 있었다.
프리메로 탄광은 1900 년대에 채광을 시작하여 당시에는 콜로라도주에서 생산량 제2위를 차지하며 한때 500여 명의 광부가 작업하던 곳이다. 그 당시에 희생자 가운데 6명만 백인이고 나머지는 새로 이민 온 자들이거나 소수계 외국인이었다.
1887년부터 운산 광산 채광권을 갖게 된 미국인들은 광산 장비와 기술자들을 덴버에서 들여왔는데 이로 인해 이 지역 한인들이 역으로 덴버 광산에 광부로 취업하게 됐다. 당시 한인들이 하와이에서 콜로라도의 산간벽지였던 프리메로 탄광까지 건너오게 된 데에는 본토의 임금이 훨씬 높았고, 그중에서도 위험하고 힘든 광산노동 임금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사탕수수밭에서 약 10시간 이상 일을 해도 하루 임금이 60센트를 넘지 않았음에 비해 광부들은 하루 1달러 이상을 벌었고 그중에서도 제일 높은 임금을 받는 일은 탄광 속에서 다이너마이트에 불을 붙이는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1890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한인 집성촌에는 최소 200~500 명의 동포들이 거주했으리라 짐작된다. 박용만도 숙부인 박희병과 함께 이곳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숙소와 직업 소개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8년 애국동지대표회의가 덴버 그레이스 교회에서 개최되었고, 그 결과로 국민회의 전신인 중앙총회를 샌프란시스코에 설립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이에 따라서 덴버의 한인 집성촌에 살던 상당수의 한인들이 샌프란시스코와 네브래스카 주로 이주하게 됨에 따라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마침내 1910년에 프리메로 탄광 폭발 사건이 나면서 명맥을 잃게 된다.
1910년 1월 31일 월요일 오후 4시 30분, 프리메로 탄광 폭발 사고로 여러 개의 굉구가 무너지면서 국적별로 두 번째로 많은 9명의 한인 광부가 질식사 또는 압사로 목숨을 잃었다. 1910년은 우연치 않게도 미국 각처에서 광산 사고가 많이 일어나 한 해 동안 총 3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프리메로 광산회사[Colorado Fuel & Iron Corp.]가 운영하는 광산으로는 3년 안에 두 번째의 사고였다.
사고가 난 다음날 콜로라도주 유력지 『더 덴버 포스트(The Denver Post)』는 1910년 2월 1일자 신문에 「108 DEAD, IS TOLL OF DISASTER」라는 5단 제목 하에 108명이 희생되었다고 보도되었다. 폭발의 강도가 너무나도 컸기에 지하 깊숙이 뻗은 작업장까지 가는 여러 개의 통로가 무너져 막혔고 곳곳에 남아 있는 가스와 언제 다시 폭발할지 모르는 독성 먼지 때문에 희생자 인양 작업은 6일 만에 중단되었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75명의 사망자 가운데 사고 발생 6일째인 1910년 2월 6일까지 55명의 희생자만 인양되였고 나머지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희생자 가운데 9명이 한국인으로 확인되었는데, 그들에게는 61달러 50센트의 장례비가 지급되었다. 트리니다드에서 발행된 신문 『더 크로니클 뉴스(The Chronicle News)』의 2월 3일자 기사에는 희생자들 9명은 눈물을 흘려줄 가족은 고사하고 장례식을 치러 줄 목회자도 없이 겨우 몇 명의 동족만 참석한 가운데 트리니다드의 가톨릭 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프리메로 탄광 폭발 사건은 미국에서 일어난 광산 폭발 사건 가운데에서도 대형 사건으로 꼽힐 정도이다. 최초 108명의 희생자에서 75명이라는 공식적인 발표 사이의 간극과 9명의 동포 외에도 사망자 명단 중 일본인으로 표시된 희생자 가운데에는 Kim, Choi 등 한국인의 이름들이 보이는 점으로 미루어 보건대, 희생된 동포의 수는 그 이상이 될 것으로 짐작된다.
희생자의 수를 떠나서 당시 프리메로 인근까지 애국동지대표회의가 결성되고 1910년대 록키산맥 지역의 원근 광산에서 일한 한인 노동자를 중심으로 덴버 지방에 많은 동포들이 집단 부락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은 귀중한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