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환·전명운 의거

한자 張仁煥·田明雲 義擧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시대 근대/개항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3년 3월 23일
정의

1908년 3월 2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오클랜드 역에서 장인환, 전명운 열사가 한국 정부의 외교 고문인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사건.

개설

장인환·전명운 의거는 1908년 3월 2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오클랜드 역에서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인 미국인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가 일본 특사로 미국을 방문하였다가 장인환(張仁煥)[1876~1930], 전명운(田明雲)[1884~1947]에 의해 저격된 사건이다.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 30분경 스티븐스를 태운 자동차가 오클랜드 페리 부두에 도착하자 전명운이 스티븐스에게 접근하여 권총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되자 총자루로 얼굴을 후려치고 달아났다. 쓰러졌던 스티븐스가 일어나 전명운을 추격하자 장인환이 뒤에서 권총 세 발을 발사했다. 첫 발은 달아나는 전명운의 어깨에 맞고, 두 번째 발은 스티븐스의 오른쪽 어깨뼈, 세 번째 발은 스티븐스의 등 아래쪽 복부를 명중하였다. 장인환은 체포되고 전명운과 스티븐스는 항만 응급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중앙 구급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받았으나 스티븐스는 이틀 뒤 3월 25일 사망하였다.

역사적 배경

친일 행위로 지탄을 받고 있던 스티븐스는 1908년 3월 20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에 도착하여 가진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과의 기자 회견에서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는 제목의 친일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재미 한인들의 분개를 야기하였다. 재미 한인 단체인 공립협회대동보국회가 1908년 3월 21일 저녁 8시에 공립관에서 공동회를 개최하고 총대 네 명을 선발하여 스티븐스에게 항의하고 성명서 내용 정정을 요구하였으나 스티븐스는 거부하였다. 총대들은 3월 22일 공동회를 개최하여 스티븐스를 방문한 경과를 보고하고 다음 대책을 숙의하였다. 공동회에 참석한 대동보국회장인환공립협회전명운은 스티븐스를 사살하기로 결심하였다. 장인환전명운은 스티븐스가 워싱턴행 대륙 횡단 철도를 타기 위해 오클랜드 페리 부두로 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오클랜드 역을 거사 장소로 택하였다.

경과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을 비롯한 여러 신문은 의거와 관련한 사진과 삽화까지 게재하면서 장인환전명운의 의거를 정당하고 애국적인 행위로 평가하였다. 사건 발생 후 대동보국회공립협회는 ‘장인환 재판 후원회’를 결성하였다.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공판 투쟁을 위해 모금한 의연금은 미국은 물론이고 국내와 멕시코, 러시아, 중국, 일본 등지의 총 1,135명의 한인들로부터 8,568원 41전에 달하였다. 모금된 의연금으로 공판 경비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전명운은 4월 3일 ‘살인 미수’ 혐의로 구속 기소된 지 97일 만인 1908년 6월 27일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가 1909년 7월 장인환 재판이 완료된 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장인환은 3월 27일 계획에 의한 일급 모살 혐의로 공식 기소되어 약 8개월간 재판 투쟁을 벌였다. 1909년 1월 2일 25년 금고형을 선고받았으나 1919년 1월 10일 가출옥하였다.

결과

장인환전명운에게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추서되었다.

의의와 평가

1905년에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본의 보호국이 된 상황에서 일어난 장인환·전명운 의거는 이후 항일 민족 운동에 있어서 ‘의열 투쟁(義烈鬪爭)’이라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참고문헌
  • 『장인환·전명운의 샌프란시스코 의거 자료집』Ⅰ·Ⅱ(국가보훈처, 2008)
  • 김도형, 「전명운의 생애와 스티븐스 처단 의거」(『한국독립운동사연구』3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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